*지난 4월 26일 알커먼즈와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주최로 인디스페이스에서 다큐멘터리 <침몰가족>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이어 알커먼즈에서 참가자들의 <재잘재잘>이 이어졌다. 당일 행사에 참가한 두 연구자의 감상을 나눈다. (연구자의 집 회원, 한디디)
침몰가족: 지금의 시간에 휘말리며, 춤추며.
작성자: 김현철 (지리학자)
4월 26일. 유독 비가 잦았던 봄, 드디어 따뜻해진 주말. 침몰가족 상영회가 홍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다. 《침몰가족》은 1990년대 후반, 도쿄 싱글맘 가노 호코씨가 저녁 시간 동안 아이를 돌봐줄 사람들을 구하며1 이루었던 네트워크이자, 연대이자, 가족이었던 사람들 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GV에는 감독 가노 쓰치, 도시연구가 한디디(사회), 가족구성권연구소 공동대표 김순남(패널), 독립연구활동가 심아정(통역)이 참여하였다. 현장 관람객들로 이뤄진 오픈채팅방에서는 ‘가족’이라는 것, 돌봄과 낯섦, 공동체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다. 뉴스레터에서는 GV에서 오간 대화들, 그리고 작성자가 관람 이벤트에 우연히 당첨되어 받은 『침몰가족』(가노 쓰치 저, 박소영 역. 2022)을 읽으며 가졌던 단상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우선 GV에서는 다큐멘터리 제목이기도 한 ‘침몰가족’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독은 당시 공동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침몰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느 정치인이 침몰가족이 머물렀던 집 근처에서 “지금 일본은 가족의 유대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혼 가정도 늘고 있습니다. 남자는 일하러 가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사라진다면 일본은 침몰하고 말 것”(가노 쓰치 저, 2022: 27)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감독은 돌보미들은 그것을 보고 처음에 화를 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침몰가족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쓰치 감독의 대답을 들으며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 낙오연대2 등에서 모여 공동생활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침몰이라는 단어를 마냥 자조적이지도, 또 허무하지도 않게 받아들인 점이다.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에서부터 관계를 직조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시 일본이 침몰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 그 정치인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가면’ 자신을 구원해줄 굳건한 방주가 있다고 믿었던 듯 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가족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혹은 어떤 가족을 이루더라도 우리는 모두 침몰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것은 ‘우리 가족만이라도’ 이 거친 세상에서 구원하고 싶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주식을 사고, 신도시에 이사를 하고, 교육에 열을 올리는 마음에도, 그저 길가에 핀 꽃 하나를 바라보며 봄을 만끽하다가도 돌연 늙어가는 부모, 늙어가는 나를 느끼며 미래가 불안해지는 마음에도 깃들어 있다. 현재를 끊임없이 미래로 귀속시키는 사회는 ‘침몰’이라는 감각을 현실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남녀가 원가족을 이뤄 ‘제대로’ 재생산을 이루어야 살아남을 것이란 감각은, 리 에델만(Lee Edelman, 2004)이 허구적 일관성(fictional coherence)이라 칭했듯3, 허구를 진실인 양 끊임없이 붙잡음으로써만 존재한다.
가노 호코씨는 자신의 아이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이 허구적 일관성에 깃들어 있는, 개인의 책임과 능력으로 가득 찬 구원적 미래가 아닌 우연적 현재을 붙잡았다. 그녀는 쓰치 감독을 “만나고 싶어서 낳았다”고 말하고, 또 쓰치는 “어쩌다 생긴” 존재라고 말한다. 이 ‘어쩌다 생긴’ 존재와 이루는 관계는 공동체와 동떨어진 기업가적인 개인의 삶의 주기를 벗어나 있다. 이 우연에의 긍정은 당일 GV에 있었던 감독과 김순남의 말에도 드러나있다.
“영화 전반적으로 우연하게 태어났고, 우연하게 돌봄을 주고 받았고 우연하게 가족이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연성이 가지는 삶의 확장성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우연히 이곳에 와서 섞여버리는 시간이 가능했습니다. 이 작품은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잃지 않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1살의 싱글맘이 어떻게 살아갔을까, 생존의 위기로만 볼 수도 있었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여정과 긴밀히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 김순남
우연을 바탕으로 하는 만남, 원가족 중심의 체제를 넘어서는 연결로의 관계는 ‘낯섦’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열린 집과 관련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침몰가족이 재미있어보이면서도 세상이 험해서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낯선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을까요?“란 플로어의 질문도 이러한 재정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질문에 김순남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되게 중요한 질문이고 쉬운 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낯선 존재‘가 없는 세계를 생각하면 어떨까 싶어요. 낯선 존재, 사실 낯선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낯섦이 공포로 사유되는 건 사회적인 것 같습니다. 난민이라든지 이주라든지. 우리가 기존에 무엇을 익숙하게 생각해왔나 했을 때, 대표적으로 혈연관계가 있겠죠. 혈연관계도 사실 가장 익숙하지만 낯선 타자들이에요. 어떻게 보면 익숙함과 낯섦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낯섦이 확장되는 것이 관계가 실천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를 혼자 두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보육 일기를 쓰고 있잖아요. 아이를 어떻게 마주할지 모르는 낯선 감정을 논의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낯선 시도이고 낯선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봐요. 엄마 혼자서 무력하게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배고플 때 먹이는 돌봄이 아니라 관계를 확장하는 것. 그렇기에 낯섦을 관계를 확장하는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다양한 실험과 열린 유대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 김순남
그러나 낯섦과 우연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호코씨는 아무런 애정과 책임 없이 무한한 우연성과 낯섦에 그저 쓰치를 던지지 않았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들”에게 공동육아를 함께 할 이들을 구했다는 것(쓰치 감독, GV 중)은, 낯섦과 열림을 긍정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구체적으로 발을 딛고 맺어가는 친밀함에의 관계 ‘사이’에서 침몰가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 말은 감독의 아래 답변에서도 드러난다.
“그 낯선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침몰가족에 오게 된 사람들은 1990년대 인터넷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전단지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면서 알렸기 때문에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입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었어요.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를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 사이 교류의 힘으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전단지를 전달하려면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야 하잖아요. 시노부 상이라든가. 사람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지만 그 세기에 대한 신뢰인 것 같기도 합니다.” – 가노 쓰치 감독
이 낯섦과 친밀함 ‘사이’의 공간에서 침몰가족에 모인 돌보미들은 양육에 익숙하거나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 아이와 관계를 만들어”(가노 쓰치, 2022: 32)가기 위해 치열하게 회의를 열고 고민했다.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 내버려둬도 될까”(가노 쓰치, 2022: 32)라는 질문 등에는 매순간 아이를 마주치는 일이 ‘어른’ 입장에서도 고민되고 또 불안한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후코씨도, 침몰연대의 도우미들도 불안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서로를 만났다. 그리고 쓰치 감독이 자라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당시, 침몰가족의 사람들은 기억이 훼손되진 않을까, 다 큰 쓰치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등의 불안함 속에서도 다시 한번, 쓰치 감독에게 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불안함 사이에서 이루어진 우연한 만남들 이후, 우리는 ‘2025년 쓰치’를 서울의 한 공간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연대체를 만들어갔던 호코씨가 대단해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나는 또한 호코씨가 젠더 연구자였던 어머니의 영향, 낙오연대와 같은 그룹과의 교류 등 그러한 공동에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쓰치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란 생각 역시 들었다. 책에서 돌보미 중 한 사람은 호코씨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처음에 호코가 널 안고 왔을 때, 내 눈에는 정말 지쳐 보였어. 이대로라면 너를 죽일 수도 있다는 위기감 같은 게 확 느껴지더라.”(가노 쓰치 저, 2022: 66).
실제로 GV에서 김순남 선생님이 말했듯, 사회적·경제적·관계적 지원 없이 폐쇄적 관계로만 수렴하는 원가족 중심 체계가 어떠한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 우리는 목도해 왔다. 밀린 월세와 생활고를 감당하지 못해 세상을 떠난 세 모녀, 끊임없이 악화된 환청과 망상으로도 도움을 청할 곳 없이 괴로워하던 아들과 그 아들의 손에 생을 멈춘 아버지. 비극 속에 가까운 이를 잃은 가족들은, 그러나 또다시 그 상실의 책임이 가족에게 전가되는 악순환 속에서 ‘원가족’이라는 폐쇄성 속에 더 깊이 숨어버리기도 한다. 예정에 없던 임신 앞에서도 “만나고 싶어서 낳았다”는 말을, 현재 원가족에게 가해지는 양육의 책임과 무게에서 쉽사리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욱이 침몰가족은 마냥 낭만적인 공간이지도 않았다. 침몰가족의 한 아이였던 메구가 기억하듯 침몰가족이 머물던 공간은 “다 같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하고 “쥐도 돌아다녀 친구를 부르고 싶지 않았던”(가노 쓰치, 2022: 80) 공간이었다. 또한 작가가 친구에게 “침몰가족은 3밀4가족이네”(가노 쓰치, 20224: 233)라는 말을 들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특정 상황에서 한없이 취약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침몰가족이 유지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상처들과 내밀한 권력구도가 있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각자 다른 배경, 다른 정치 성향, 다른 삶의 습관들을 어떻게 조율하며 함께 해야 할까에 대한 문제는 그저 공동체에 대한 열망만으로 넘어설 수 있는 것들이 아닐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며 느껴지는 순간순간의 불안에 내가 또다시 미래로 휩쓸리려 할 때, 나는 돌보미 중 한 명이었던 시부노가 쓴 글을 읽고 다시 현재를 더듬었다. 사부노는 “왜 돌봄을 하러 오는가“(가노 쓰치, 2022: 31) 질문에 거창한 세계에 대한 정의, 육아에 대한 윤리의식이 아니라 “흥미로운 캐릭터”인 쓰치가 “달라져 가는 모습을 기억하는 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 시간이 지나고 같은 방향을 되돌아보며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가노 쓰치, 2022: 31)을 위해 온다고 답한다. 어쩌면 내가 위생과 3밀과 같은 부분에 ’먼저‘ 걱정이 갔던 것은 공동체의 목적과 도구를 헷갈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도구‘를 목적인 양 착각하며 정돈된 시작점을 바란다. 그러나 관계는, 공동체는 그렇게 흐를 수 없다. 인류학자 서보경은 능동도 수동도 아닌 중동태를 우리말 ‘휘말리다’로 설명한다.
“‘휘말리다‘는 ‘행하다‘와 ‘당하다‘로 특정지을 수 없는 상태, 즉 중동이 어떤 형세인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상을 제시해준다. ‘휘다‘와 ‘말리다‘의 합성어인 ‘휘말리다‘에는 동사의 각기 다른 두 가지 형태가 함꼐 쓰인다. 즉 능동형은 ‘휘다‘와 ‘말다‘의 피동형인 ‘말리다‘가 결합되어 하나의 동사를 이룬다. 휘말린다는 건 행하면서 당하는 일이라는 게 동사의 형식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서보경(2023: 349)
우리는 휘고, 말리며 서로를 만난다. 어쩌면 내가 다큐멘터리와 책을 보며 공동생활의 과정이 순탄하기만을 바랐던 것은, 일본이 침몰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정치인의 직선적 미래에의 감각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휘말림의 과정은 긍정의 감정으로만 가득 차 있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 과정에는 위험과 불안, 갈등, 때로는 더러움이 공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으로 여겨진 단어들은 어쩌면 단순히 긍정의 대비항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본의 인디밴드인 MONONO AWARE가 영화를 위해 작곡했다는 A.I.A.O.U 노래 가사에도 나와있듯, “춤을 추기 전에는” 우리는 서로를, ‘이상하게’5 펼쳐질 현재를 “알 수 없”다.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미래가 아닌 지금, 춤을 추며 우연으로의 ‘너’와 휘말리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열망 이상으로 공동의 세계를 지어가는 힘 그 자체일 것이다.
참고문헌
가노 쓰치 저, 박소영 역. (2022). 『침몰가족: 비혼 싱글맘의 공동육아기』. 서울: 정은문고.
서보경. (2023). 『휘말린 날들: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서울: 반비: 민음사 출판그룹.
홍예륜. (2025). 「투기적 도시주의와 재생산적 미래주의의 이론적 교차: ‘아이’를 매개한 규범적 미래의 기획과 공간적 실천」. 공간과사회 35(1): 62-94.
Lee, E. (2004).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 당시 그녀가 주변에 돌린 전단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 “나는 쓰치를 만나고 싶어서 낳았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종일 가족만 생각하느라 타인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살다가 아이는 물론 나 자신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동육아라는 말에서 공동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아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등 아이와 지내다 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가노 쓰치 저, 박소영 역, 2022: 15).[↩]
- 낙오연대는 “1992년 와세다대학 동창이던 가미나가 고이치와 페페 하세가와 가 결성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한 청년들의 모임(쓰치, 2022: 20)”이다.[↩]
- 최근 공간과사회에서 홍예륜은 리 에델만의 허구적 확실성의 개념을 투기적 도시화와 연결시키며 허구적 확실성(fictional certainty)(홍예륜, 2025: 78)로 확장적 재개념화를 시도하였다. 너무나 매력적인 글이니 일독을 권한다.[↩]
- 3밀은 “밀폐·밀집·밀접의 줄임말로, 2020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생활 수칙으로 ‘NO! 3밀’ 구호를 내건 뒤 일본 전역엥서 널리 쓰이며 그해의 유행어로 선정되기도”(가노 쓰치, 2022: 233)한 단어라고 한다.[↩]
- 감독이 다큐멘터리에서 침몰가족을 일컬어 ‘이상한(재밌는) 가족’이라고 칭했던 데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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