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경의선 공유지에서 ‘연구자의 집’ 건립을 시작합니다. 이곳은 ‘비인간적인 투기적 개발에 의해 쫓겨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곳은 ‘공공의 사익추구와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에 의해 공공성이 무너진 곳’입니다. 하지만 ‘존엄성과 기쁨을 회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모여서 스스로 희망을 찾으려는 바로 이곳에서 ‘연구자의 집’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 십 년간 사회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일상이 위기가 되었습니다. 사회양극화는 심화되어 서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아현동에서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렵다”며 서른 입곱 박준경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수/연구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역할을 다 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지난 12월 12일에는 태안화력 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님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서 사망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발전소의 굴뚝에서 품어대는 연기는 마치 김용균님을 삼키고 태우는 연기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지난 11일에는 파인텍 노동자 2명이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426일 만에 내려왔습니다. 전주 택시노동자 김재주님은 고공농성 510일 만인 오늘,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쉬워도 땅에 발을 딛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하늘조차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비겁했습니다.

작금의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지성의 상아탑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엘리트주의, 학벌주의, 권위주의, 그리고 분과학문적 폐쇄성에 빠진 기존의 지식생산체계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탈정치화되고 탈가치화된 지식만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대학에서 학내 민주주의와 학문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비정규 교수/연구자들의 값싼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사회문제에, 일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실천하겠습니다. 대학을 살리고 학문과 지식도 제대로 생산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새로운 학술운동, 새로운 교수/연구자 운동의 거점을 대학 밖에서 마련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다양한 대안적 지식생산체계들이 모색되고 실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부 대학의 엘리트 중심의 학술활동을 넘어, 모든 시민들이 학술과 진리 탐구의 주체임을 천명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학술과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연구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권위적 억압에 저항하는 좁은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탐구에 대한 자유”이고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보편적 기본권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무엇인가에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자유와 용기>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들었고, 인간이 괴물이 되는 것을 막는 힘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학술운동은 대학의 정규직 교수 중심의 위계적 조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대학 안과 바깥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유연하게 연대할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이 학술운동을 통해 실천적 아카데미즘을 복원해야 합니다. 1970,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에 저항한 지식인과 교수/연구자들이 이 땅의 민중들과 연대하면서 추구하였던 실천적 아카데미즘의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학문적 성취와 연구의 결과를 시민들과 공유하고, 대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현장에 기반을 둔 문제제기적 학술활동’이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학을 새롭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첫걸음을 내 딛고 있을 뿐입니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이 ‘연구자의 집’에서 민주주의적 실천에 의해 정해질 것입니다. ‘연구자의 집’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 커먼즈’를 만드는 것이 활동의 대원칙입니다. 이와 더불어 ‘연구안전망’ 구축을 위한 연구자들의 상호부조 방안들이 논의될 것입니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지식, 정보, 자원을 상호 공유, 교류, 협력하면서, 동시에 대중과 소통하는 지식 공유 플랫폼을 만들 것입니다. 연구를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 방안, 자녀 돌봄 걱정을 덜 수 있는 연구환경 조성 방안 등이 고민되고 실천될 것입니다.

황폐해진 학문과 대학을 바로잡고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사회화’, ‘위험의 방치’가 만연한 이 현실을 이겨내는데 힘을 보탤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수/연구자들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지키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나아갈 것을 천명하며, ‘시민과 함께하는 연구자의 집’ 창립을 선언합니다.

2019년 1월 26일

연구자의 집 창립총회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