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집 회원 인터뷰9 (박지훈 운영위원)

활동소식

인터뷰 일시 : 2024년 4월 8일(월) 오후 8:00 ~ 9:30

장소 : 줌 온라인

인터뷰이 : 박지훈 (연구자의집 운영위원, 국립부경대 글로벌지역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진행 : 박서현 (연구자의집 미디어팀,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연구자의집 활동의 시작

 

진행자 ‘지식공유 연구자의집’(연집)은 “대학 안과 바깥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유연하게 연대할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학술운동을 통해 실천적 아카데미즘을 복원[하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커먼즈’를 만[들며] ‘연구안전망’ 구축을 위한 연구자들의 상호부조 방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월 26일 창립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연집에서 활동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개인적인 성향과 인연 때문입니다. 아마도 2020년 5월로 기억하는데, 어느날 아침 이승원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연집이 법인화되기 전이었고 저는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백수였습니다. 전화로 연집에 대해 소개를 받고 정동에 있는 모 사무실에 가서 처음으로 다른 분들을 만났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5월과 6월 연구재단 정책 프로젝트 준비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몇몇 단체들이 모여서 팀을 구성한 후 사직동에서 일을 했고요, 저는 연집 파견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이때 천정환 선생님을 포함하여 지식공유연대 및 인문학협동조합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 받은 후 입원해 계시던 때라 낮에는 사직동 사무실에 가고 저녁에는 매일 연건동 병원에 가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여름과 가을에는 박배균 선생님이 연구책임자를 맡은 ‘강사 및 연구자 사회주택 수요조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 직후에는 지식공유 플랫폼 사업계획안 같은 것을 만들었던 기억도 있고요. 결과적으로 첫 번째 정책 프로젝트는 잘 안 되었습니다. 원래 그 사업이 선정되었더라면, 그 프로젝트의 연구원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떨어지는 바람에 급하게 들어간 곳이 모 대학의 HK+ 사업단이었습니다.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연집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2020년 늦봄부터 가을까지 이러한 경험을 통해 2010년대 후반 이후의 한국 고등교육 정책의 기조 변화와 같은 것에 대해 여러 문헌들을 읽기도 하고 연구재단이나 교육부분들께 직접 들을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학위를 받은 직후 대한민국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재편과 관련된 논의를 접하게 되었다는 점, 나아가 그 무렵 연구재단이 지원하는 대형 공동연구사업에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일했다는 점, 또한 위에서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모 사립대에서 영어강의를 한 점 등은 지금도 그렇지만 향후 연구에도 주요 자양분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의 고등교육과 관련하여 여러 문제들을 압축적으로 체험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체험을 오롯이 개인의 좁은 시각에서 보는 게 아닌,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나아가 여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학술운동을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이것이 개인적인 연구 주제와도 관련이 있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인문정책연구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연집의 학술운동에 대해서는 다시 질문을 드리게 될 것 같은데요. 그전에 선생님께서 참여하신 경제·인문사회연구소(경인사연) 인문정책연구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 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에 대해 문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위 연구는 연집 운영위원 김민환 선생님을 연구책임자로 하여 연집에서 수행한 것인데요. 연구의 취지와 내용, 결과 등 위 연구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지훈 현재 대학원생이나 비정규직 연구자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요. 이 맥락에서 연집에서도 무엇인가를 하자는 얘기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도 하고 있었고요. 예컨대, 연집은 연구자 복지법과 관련한 토론회를 연속 개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연구자 권리선언도 발표했습니다. 주로 박철현, 김민환 두 분 선생님이 실무 책임이었고, 저는 회의 및 토론회 기록하는 일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프로젝트 직전에 경인사연에서 여성연구자에 대한 프로젝트를 발주하여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에 소속된 김지수 선생님께서 참여하시기도 했고요. 제가 알기로 저희 연구는 이것의 후속 프로젝트라는 성격을 일정 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의 주제는 원래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조사와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경인사연 과제 자체에는 비정규직 연구자 전체에 대한 연구안전망 구축이라는 주제가 포함되지 않았었는데, 우리가 제안해서 이를 통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연집의 연구는 한편으로 대학 밖 학술단체의 운영현황과 지원방안, 나아가 지원정책에 대한 선호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잘 아시겠지만, 과거에도 대학 밖 학술단체는 있었습니다. 예컨대, 1980년대 해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몇몇 연구모임이 공부방 형태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도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났고요. 그런데 201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단체들과 연속성이 있지만, 동시에 불연속성도 보유한 단체들이 계속해서 생겨났습니다. 이런 단체들이 특히 마포, 신촌 지역에 모여 있는데요, 이 단체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운영상의 어려움은 무엇인지, 정책적 지원을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보고서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연구자 전체의 실태를 조사하고 연구자 공제회법의 초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400명 이상의 비정규직 연구자와 박사과정생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김민환 선생님도 본 연구의 영상보고서에서 얘기하셨지만 연구자들의 생애주기별 일상생활과 관련된 부분들에 대해 많이 물어봤습니다. 예컨대 대출이나 소득 문제만이 아니라 주거비, 아르바이트, 노후 대책, 심지어 건강 문제도 물어봤었습니다. 특히,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가도 물어봤습니다. 예견한 대로 우려스러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론 좀 더 세부적 조사가 필요합니다. 모집단 등을 확보한 상태에서 샘플을 적절히 추출한 후 진행한 조사가 아니기 때문인데요. 물론, 현상황에서 이런 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되는 우려스러운 현황에 대해 연집도 마찬가지고 연구팀도 마찬가지인데 연구자 공제회법을 통해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하여 공제회법의 초안을 만드는 데까지 진행했습니다.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지원과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문제 


진행자 2000년 후반 연구재단에서 대학 밖 학술단체를 지원하는 정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당시 제가 활동하던 단체에서 이 정책에 지원할 것이냐를 두고서 토론을 했었습니다. 논의 끝에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당시에는 자립성, 자율성을 위해 지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 밖 학술단체에서 연구재단의 정책적 지원에 대해 호불호가 갈린다면은 그 주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지훈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단 말씀하신 것처럼 자립성, 자율성,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저희가 인터뷰 했던 단체 중에서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런 곳은 지원을 거부합니다. 그에 반해 지원을 좀 더 원하는 쪽도 있었고요. 지원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해 본 혹은 못 해 본 곳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건 단체별로만이 아니라 특정 단체 내에서도 소속 구성원들 간 입장 차이가 갈리는 사안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원을 원하는 쪽도 경제적인 지원 자체에만 주목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대학 밖 학술단체의 경우 대체로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전문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많은 경우, 이게 처음부터 무슨 사회운동이나 학술운동을 하겠다고 모인 단체가 아닙니다. 주로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연구하거나 관심을 갖는 이론을 학습하기 위해 모인 측면이 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대학, 나아가 연구재단체제에서는 그러한 자율성이나 독자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대학 내에서 비판적 연구를 하는 이들이 줄어들기도 했고, 대학원생이든 신진 연구자든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고용되면 연구 주제부터 제약을 받게 되거든요. 이 맥락에서, 아시겠지만, 요즘 대학은 대규모 공장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해서도 독립적 수공업자 혹은 장인으로서의 연구자가 정하는 게 아니라 고용인이 정합니다.

이에 대학 밖에서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함께 연구하거나 관심 있는 이론을 공동으로 학습하고 싶어 나온 거라 여기서부터 정부의 정책 지원에 대한 선호가 나뉘는 듯 합니다. 한편에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으면 자율성, 자립성, 정체성이 훼손될 것이라 판단하는 것 같고, 다른 쪽에서는 큰 틀에서 그런 것들이 보장되면 일정한 타협을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신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사안을 말씀드릴 수 있는데, 사실 이런 입장을 정하는 데는 단체나 연구자 개인의 물적 조건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인터뷰했던 단체 중 가장 완강하게 국가나 자본의 지원을 거부했던 곳은 정년 전 스스로 퇴직한 연구자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거부를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생계에 큰 무리가 없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개별 연구자 간 입장차도 각자의 물질적 기반의 차이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 조건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뭔가를 설명할 때 빼먹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편,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정부의 지원이냐 아니냐 이상으로 어떻게 대학 밖 학술단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정부 지원이 이뤄지게 할 것인가로 보입니다. 대학 밖 연구단체에서 자체 세미나를 통해 새로운 연구 주제를 형성하고 그러한 연구 계획에 대해 일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지원을 한다면, 현재 대학 내에서 이뤄지는 공동연구와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제도를 잘 설계하면, 현재는 지원을 거부하는 분들도 입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방식을 통해 대학 내외부가 협력적, 아울러 경쟁적으로 상생할 방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정책의 성공이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이원화를 고착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의 대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 나아가 대학을 연구기관이 아니라 단순히 교육기관, 특히 최근에는 일종의 ‘취업사관학교’로만 조망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도 있거든요. 또한, 한국의 경우에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때도 사회과학적 연구 결과에 기반한 방안 모색보다 중앙관료나 정치인의 역할이 좀 더 중시되는 것 같고요. 여기에 그 관료나 정치인이 우리편이냐라는 문제가 더해지는 거죠.

그렇다면, 학계에서 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구를 해서 직접 보여주는 방법도 있는데 현 상황에서는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일단, 젊은 연구인력의 경우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정규직 교원도 수업을 너무 많이 합니다. 이번 학기 지방거점국립대의 한 조교수는 수업을 4-5개씩 하더군요. 거기다 각종 일반 행정, 학과 발전을 위한 연구재단 프로젝트, 학교 랭킹을 올리기 위한 사업를 합니다. 그 와중에 논문도 써야하기 때문에 ‘이런 걸 논문으로 써야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주제를 가지고 짧은 글을 쓴 후 심사통과가 쉽고 게재가 빨리되는 학술지를 위주로 투고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현재 학술생태계 이원화 구조의 고착이 기존 대학과 한국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건 교육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자기도 잘 모르는 분야를 급하게 준비해서 가르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많은 경우 대학원 교육은 더 허술하고요. 때문에, 현 체계 하에서는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정규직 연구자의 정체성도 흐릿해지는 것 같아요. 일단은 생존 및 안정적 생계를 보장받은 데 대해 감지덕지하는 상황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어떻게든 대학 밖에 대한 지원을 가능하게 하고 그 속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차피 인력의 일부는 양쪽 모두에서 교류할 것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경쟁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력적 관계를 만들면 어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학술운동에 대하여

 

진행자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에서 복지법 구상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연구자를 정의하는 게 어렵구나라는 생각했었는데요, 연구자를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취지나 이념적으로 맞지만 구체 현실에서 법적 지원의 문제를 생각했을 때 아주 분명한 어떤 선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위 연구에 대해 질문을 드리면 이 연구는 연구자의 상당수가 소위 프레카리아트, 불안정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자 이러한 현실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대응, 연구자 자신에 의한 대안의 모색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점에서 이 연구는 학술적 ‘연구’임과 동시에 ‘운동’의 성격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연구를 연구적 실천, 학술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실천이 예컨대 1980년대 후반 한국 학술운동과는 구분되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어떤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전의 학술운동과 구분되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술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학술운동은 일차적으로 특정 학자군이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지적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새로운 (메타)이론 패러다임을 구축하거나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좀 더 유행하는 표현으로 말하면, 이는 일종의 학문적 전회(turn), 그중에서도 개인적 전회가 아니라 집단적 전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학술운동은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앞서 말한 지적 운동과 결부된 학자들의 사회운동을 지칭합니다. 이런 의미의 학술운동도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특정 학자군의 현실 참여 정도만을 말할 수도 있지만, 인텔리겐차의 이론적 지도에 따른 변혁운동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 이런 의미의 학술운동은—첫 번째 의미의 학술운동과 마찬가지로—더 이상 개혁 혹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뉴라이트 운동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포스트 민주화 시대 학술운동은 이른바 ‘진보’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끝으로 학술운동은 학자의 운동이기에 앞서 학자나 학계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과거의 경우 학원민주화, 오늘날의 경우 오픈액세스 등을 포함하는 지식공유운동이 이러한 사례에 해당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러한 학술운동은 일종의 부문적 사회운동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이는 학자 및 학계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기에 학자의 당사자 운동일 수 있고, 또 그런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이들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학술운동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위의 세 가지 학술운동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학술운동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앙가주망’을 학자, 보다 넓게는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로까지 격상시키곤 합니다. 때문에, 여기서 학술운동은 윤리적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부문적이든 총체적이든 사회운동으로서의 학술운동은 이론과 실천, 즉 ‘지행’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에 궁극적으로 지식이론(즉, 인식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혹자는 인간적 사유와 외부 세계의 대상 간 일치 여부를 보장하는 제3의 초월적 기준은 없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오직 ‘함으로써의 앎’만이 가능하다는 프래그마티스트적 인식론을 선호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는 “해봐야 안다”는 입장이기에 이런 입장을 취한 분들에게 지행합일은 윤리학적 문제(도덕적 책무)이기 전에 인식론적 문제(앎의 확보 조건)입니다. 그리고 저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르크스의 두 번째 테제를 이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또한, 인식적 상대주의를 극복하거나 최소한 보완하는 판단의 합리성과 관련하여 앤드류 세이어가 제시한 기준인 ‘실천적 적합성(practical adequacy)’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이고요.

그리고 현대 사회과학에서 이런 입장에 친화적인 이들은 많습니다. 예컨대, 비판적 지향을 가진 이들에게 악명 높은 밀턴 프리드만은 자신의 경제학을 실증주의 경제학이라 불렀지만, 그 역시 지식의 확보조건과 관련해서는 함으로써의 앎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가치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냐라는 맥락에서 positive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증주의보다는 실정주의가 더 타당한 번역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간, 그는 존재론적으로 경험론자이고, 또한 마르크스가 경멸했던 이론의 절충주의를 허용했지만, 최소한 앎의 확보 조건과 관련해서는 실천적 적합성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경제이론 그 자체보다 경제정책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결국 특정 경제이론이 타당한지의 여부는 그로부터 도출된 정책을 시행해봐야 안다는 겁니다.

나아가, 2010년대 이후 국제정치학계의 분석적 절충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유사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은 프리드만과 달리 존재론적으로는 심층 실재론을 배격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프리드만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마르크스와는 달리 이론의 절충주의를 허용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그런데 앎의 확보 조건과 관련해선 이들 역시 문제해결을 목표로 하는 이론을 구축하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을 직접 수행해 본 다음 지식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니까 좌든 우든 혹은 다른 뭐든 연구자의 현실 참여는 지식인론을 들먹이기에 앞서 그냥 인식론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케케묵은 진리대응설을 고집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는 세련되었지만, 학문 활동을 무슨 예술품 제작과 동일시하는, 그렇기에 지식의 존재 근거를 현실정합성이 아니라 이론적 우아함에서 찾고 학술토론을 자신의 심미적 취향에 대한 변명 정도로만 간주하는 상대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전자는 고고한 상아탑에서도 진리재현이 가능하며,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후자는 그러한 예술적 전문 활동과 현실적 해방 간의 무관성을 주창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사회운동으로서의 학술운동이란 학자로서 자신이 뭘 해야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이의 외도입니다. 나아가, 더 가혹하게 말하면, 스스로가 뭘 해야 하는 사람인지 알지만 학자로서의 사변적 혹은 심미적 능력이 부족한 그리고/혹은 진리 재현이나 작품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의지가 박약한 자가 권력욕에나 눈이 멀어 폴리페서로 타락하는 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니 너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일갈도 등장하고, 특정 학자군이 좋은 자리를 독식한다며 ‘마피아’ 어쩌고 하는 거죠.

또 다른 평가는 사회운동으로서의 학술운동이 갖는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유독 대학원생이나 신진 연구자가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만류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짓 하다가는 박사학위 취득이나 정규직 자리를 못 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건 연집 활동을 한다고 밝힌 제가 복수의 분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의 아카데믹 커리어는 끝났다’는 우려섞인 경고에서 주요 고려사항은 윤리도 진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리, 특히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인식론적으로 프래그마티스트이거든요. 물론, 이들은 저를 우려해서 그렇게 얘기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신진 경제학자가 국책연구기관에서 자문활동 등을 하거나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했더라도 같은 평가를 들었을까, 그리고 안보학자나 외교정책 전공자가 국방부나 외교관련 부처 일을 했어도 유사한 평가를 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오늘날 비판적 사회과학과 사회운동은 비판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독특하게 폄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것 자체가 하나의 검토대상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얘기를 바탕으로 이제 선생님께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그 질문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 충분히 말한 후에야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연집의 정책 연구가 학술운동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집단적으로 수행되는 지적 전회나 총체적 사회운동으로서의 학술운동이 아니라 학자와 학술장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 학술운동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이런 실천이 1980년대 한국의 학술운동과 어떻게 구분되냐고 물으신다면, 과거에는 세 가지의 학술운동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1980년대에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회가 있었고, 그러한 (메타)이론 패러다임의 전회가 사회구조와 변동, 계급, 계층, 노동, 농민, 빈민 등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로 진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민족, 민주, 그리고 (노동자 중심의) 민중을 위한 사회개혁, 심지어는 변혁운동과도 연결되었습니다. 나아가 학원민주화에 대한 각종 운동도 이것과 결부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교협이나 학단협 등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학단협은 유명무실하고, 민교협은 그냥 연명치료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비판적 사회과학 자체가 인기 없고, 관련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이 미디어 환경도 많이 변해 현재는 공식적인 담론을 담은 학술서적이나 논문보다 세론과 풍문, 심지어는 음모론 위주의 인터넷 매체가 보다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견을 가진 이와의 토론보다 같은 편끼리 모여 웃고 떠들고 상대 세력에 대한 특정한 인상, 심지어는 혐오를 유포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 상황에서 신생 대학 밖 학술단체가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연대 모임이 더디지만 진행되고 있고, 오픈 액세스 등의 지식공유운동이 남은 거지요.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하면, 과거에는 이런 활동이 ‘지사’로서의 지식인이 수행해야 하는 책무로 간주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지식인이라는 말조차도 잘 쓰이지 않으며, 연구자 자기의 개인적 실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해한 행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이기 때문에 정치권력에 의한 직접적 탄압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이 맥락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 좁은 의미의 부문적 학술운동을 어떻게 다시 다른 의미의 학술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넓은 의미의 학술운동이라 부른 것은 지식이론의 차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건데 현재는 이런 메타이론적 사안도 잘 고려되지 않습니다. 문서 위에 적힌 수학적 검증이나 통계적 확증 자체가 현실 정합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최근 몇 년 사이 혹은 몇 단계 몇 년 차에 몇 %의 실적을 채웠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 자체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할 수는 없고, 뉴미디어를 외면할 수도 없지만, 학문은—정론이든 황색이든—저널리즘과 달리 그 나름의 의미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비정규직 연구자와 대학원생의 문제는 이념이나 성향의 차이를 넘어 동질적인 사회경제적 현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학술운동 중에 가장 높은 휘발성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분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화의 잠재성, 그 불씨의 확산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물론, 계급투쟁(class struggle)과 투쟁 중인 계급(classes in struggle)을 구분해야 하는 것처럼 객관적인 조건 자체가 운동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향후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 듯 합니다.

 

연집의 학술운동


진행자 학술운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연집 학술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위 연구는 연집에서 수행한 것인데, 위 연구 이외에도 연집에서는 연구자 권리선언 이후에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를 진행해왔고 R커먼즈합정을 만들었으며 연구자 사회주택을 모색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연집 학술부에서 활동하시면서 학문자본주의 세미나를 기획·운영하시는 등 연집의 여러 활동들에 참여하셨는데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연집 학술운동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연집 학술활동은 앞의 답변에 준해서 간략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연집도 현재 (메타)이론 패러다임이나 연구 프로그램 수준에서 집단적인 지적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총체적 사회운동과 관련해서는 다른 여러 조직들과 연대의 형태로 하는 게 있는데, 제가 볼 때는 좀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87년 전후로 형성된 정치적 균열구조에서나 유효할 법한 연대활동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최근 연집의 경우 활동이 많이 확산되어 저도 잘 모르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는 부당한 인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좀 더 독자적인 활동에 중점을 두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수준에서 연집 학술운동의 특징에 대해 평가하는 것보다 향후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연집이 그냥 그런 ‘One of them’이 되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저는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데 국힘 계열이냐 민주당 계열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연집에서 학술운동을 하려면, 차라리 1) 커먼즈와 관련된 이론 패러다임 구축과 연구 프로그램 가동에 좀 더 신경을 쓰고, 2) 그와 관련된 사회운동으로서 ‘커머닝(commoning)’이라는 실천을 수행하고, 3) 그것의 부문적 학술운동으로서 지식공유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첨언하면, 이건 쉽지 않은 문제일 겁니다. 그냥 우리끼리 어설프게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비판하고 그에 대해 서로 공감한다고 해서 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나중에 저 자신이 좀 더 준비되면 다른 자리에서 말씀드릴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데, 저는 현재 커먼즈에 대해 얘기하는 분들이 커먼즈와 커머닝, 나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 (메타)거버넌스와 관련하여 ‘현재의 주류’ 혹은 ‘미래의 주류’의 반응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정세분석(conjunctural analysis)을 적절히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정세(conjuncture)란 일련의 연속 사건들 간 결합이고, 이걸 다룰 때는 다른 사회세력의 전략적 계산과 실천을 고려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기업경영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됩니다.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하려면 전략을 수립해야 하고 전략을 수립하려면 시국 혹은 정세를 분석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는 경쟁 업체들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는데, 연집은 외려 이런 논의를 잘 안하고 있는 거죠.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경쟁 회사에서 어떤 아이돌 육성하고 있는지 신경 쓰잖아요. 동네 골목에서 족발집 하나를 차리더라도 대체재나 보완재를 공급하는 매장들을 파악하고 장사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데 우리는 이런 데 좀 취약한 것 같습니다. 이거 실패하면 그간의 그 모든 노력과 수고가 한꺼번에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저도 공부를 좀 더 해야 하지만, 현재 제가 볼 때 커먼즈 문제는 비트코인과 스마트 컨트랙트 문제 해결을 위해 경쟁 중인 복수의 알트코인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격 변동에만 민감하고 투기적 행태에 반감을 가져서 그런데, 이건 결국 플랫폼 자본주의 이후의 프로토콜 자본주의 혹은 미래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 나아가 국가 없는—혹은 국가 개입이 최소화된—(시장)사회에서의 거버넌스와 같은 문제와 연결되거든요. 기본적으로 저는 이걸 개인을 중심으로 사적 소유권을 최대한 촘촘하게 설정하고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며 극심한 가격 변동으로 인해 거래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불확실성을 다수가 참여가능한 도박으로 보완하겠다는 거로 이해합니다. 이게 비트코인과 연결되고 이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몇 가지 기술적 문제를 다루는 것을 알트코인으로 이해합니다. 이거 성공하느냐에 따라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알트코인들이 사라지겠죠. 그리고 성공한 거에 맞춰 새로운 게 생기고.

이렇게 되면 커먼즈나 거버넌스와 관련해서도 로날드 코즈나 기타 시장주의자들의 해법이 좀 더 우세하게 된다는 얘기인데, 아나코캐피탈리스트의 환상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게 어떻게든 머지 않은 미래에 힘을 발휘할 거라 예상합니다. 진짜로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이 과정에서 새로운 조절-및-거버넌스(régulation-cum-governance)가 구축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고요. 아울러 세계시장에서 모든 국가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적 그리고 지역적 헤게모니도 이 과정에서 독특하게 역할을 할 수 있고요. 세계시장에 대규모 노동력을 공급하는 대륙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한 아프리카 노동력이 세계시장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는 커머닝이 아니라 디-커머닝(de-commoning) 혹은 디-커머나이제이션(de-commonisation)으로 중심으로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라도, 이런 예상이 꼭 맞지는 않더라도 저는 최소한 이런 게 누가 핸드백 뇌물을 받았네, 이 시국에 펜디에서 사적 쇼핑을 즐겼네, 이런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현재 선거 승리를 향유하고 있는 모 정당의 주요인사들은 이런 변화와 관련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아보이고요. 이미 사모펀드랑 잡코인 초단타 차익투자까지는 꽤나 관대하게 받아들여지잖아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현재 연집은 다분히 협소화된 학술운동만 하고 있으며, 이를 확장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커먼즈, 나아가 커머닝에 대해 좀 더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과정에서는 그간 우리가 놓쳐왔던 사안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할 것입니다.

 

진행자 혹시 연집의 활동이 당사자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는 측면이 있다면, 해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했었던 학원 민주화 운동도 당사자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박지훈 네, 맞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적지 않은 차이도 있습니다. 전에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는 학생이 상대적으로 소수였습니다. 대학원은 더 그렇고요. 때문에, 대학교수만이 아니라 대학원생, 아니 대학원생이 학교 졸업 전에 교수로 선발될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생도 지식인으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런 지식인상이 점점 퇴화되다가 90년대 들어 신지식론이 부상한 후, 아울러 대학 진학률이 거의 80%에 육박한 후 변한 것 같지만, 과거의 경우 고등교육이라는 엄청난 사치품을 향유할 수 있었던 선택받은 지식인은 일종의 ‘지사’로서의 역할을 요구받았고요.

그에 반해 현재의 대학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학생은 한편으로 대학 교육의 소비자로 조망됩니다. 따라서, 원서접수 시기부터 이들을 대상으로 대학이나 학과를 어떻게 ‘마케팅’할까와 같은 문제가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대학교육의 과정에서 이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모종의 ‘인풋’, 그러니까 대학에서 가공생산해야 할 미래의 인적 자본재, 즉 ‘아웃풋’의 원료나 중간재 같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대학원생이나 젊은 연구자들은 저임금으로 활용가능한 프리캐리아트이고요.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사안 중 하나는 그들을 고용한 이들 혹은 고용자의 대리인들 또한 연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경우 모든 연구자가 노동자인 것은 아닙니다. 학문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현재 대학 내 일부 연구자의 행위는 사실상 자본가 혹은 기업인과 가까운 형태를 취하거든요. 그리고 다른 많은 비정규직 연구자들은 그들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되고요. 이 맥락에서 현 상황에서는 연구자가 노동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노자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때문에, 이는 단순히 학술노동시장의 이원화를 넘어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건 노동자로서의 연구자가 이원화되는 게 아니라 연구자 간 계급분화로 보이거든요.

더군다나 자본가로서의 연구자 중 많은 이들이 중진 혹은 원로 남성인 데 반해 그들에게 고용되어 노무관리를 받는 계약직 연구자는 대학원생이거나 신진 연구자라는 점, 뿐만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택하는 여성 연구자들이 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독특한 학술적 자본관계에는 연장자지배적(gerontocratic)이고 가부장제적인 혹은 남성지배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계로 인해 작동하는 일종의 경향성(특정 경향을 야기하는 인과적 힘)이 있기 때문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이념적 좌우파 구분도 없어 보입니다. 이는 심지어 80년대 민중, 민족, 민주를 주창하던 원로 연구자도 오늘날에는 정부나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매개로 자본주의적이고 연장자지배적이며 남성지배적인 착취를 수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특히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심지어 이들조차도 그럴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세요.

이런 환경에서 피고용인으로서의 젊은 연구자들이나 BK 사업 등에 속한 대학원생은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사례별로 정도차가 있지만 ‘과학적 관리’—혹은 학술노동에 대한 통제—도 받고요. 이렇게 되면 작업 지시를 받으면서 노동 분업에 따라 주문 받은 거 납품하느라 바빠요. 학계라 그런지 이걸 ‘숙제’라 표현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 경우 숙제는 숙제대로 해야하고 자기 연구는 또 따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걸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가 ‘능력’의 평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납품 실적을 가지고 또 서로의 등급을—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즉 ‘실적’으로든 ‘평판’으로든—나누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납품 실적 = 학문적 성취’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고용인으로서의 연구자가 피고용인인 연구자를 노동자가 아니라 ‘온전한 연구자’로 대하는 감격적인 순간도 있습니다. 너는 노동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연구자라는 것을 부르주아가 상기시켜주는 눈물 겨운 순간이랄까요? 극적인 사례긴 한데, 어떤 연구단에는 계약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이유로 주 40시간 ‘나인 투 식스’로 연구실에 앉아있는 게 원칙임을 강조하는 단장이 계셨습니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을 매일 기록해서 매주 단장에게 보고했고요. 주 6시간 허용되는 강의는 연구단의 일이 아니기에 그 시간은 빼야한다더군요. 그러니 나인 투 식스에는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지만, 주 40시간 사무실 출근을 지키라는 거지요.

이에 소속 연구자 중 어느 호연지기 넘치는 분이 역시 계약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이유로 학술노동, 휴가, 연도별 임금 협상, 그리고 사용자-노동자 간 기타 협약 등과 관련한 사안도 근로기준법에 준해서 내규를 정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더니 나는 그런 거 잘 모르며 연구자에게 그런 게 어디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니까 계약상 노동자의 법률적 의무를 강조하길래, 역시 계약서에 언급된 노동자의 법률적 권리를 강조했더니, 그 순간 ‘여러분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연구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거지요. ‘노가다’로 천대받다가 특정 순간에 ‘조국근대화에 이바지 하는 산업역군’ 같은 거로 불리는 것처럼요. 연구에 휴식이 어디 있으며, 연구자에게 휴가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나마 비로서 저희 같은 이를 불철주야 직업/소명으로서의 학문에 투신하는 연구자 취급을 해주시니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더군다나 이런 식의 관계는 항상 시장매개적이고 이윤지향적인 방식으로만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 유형에 대한 막스 베버의 구분을 활용하면, 현재의 학술장에는 경제적으로 순수하게 ‘합리적인’ 이윤 추구만이 아니라 각종 ‘정치적’, ‘전통적’ 이윤 추구 양식이 존재하거든요. 대표적으로 과장된 연구계획서와 각종 연구부정 그리고 부실한 출판 등이 그러한 사례에 속할 수 있는데, 우리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연집 연구팀이 인터뷰했던 분들 중 어느 비정규직 연구자의 말을 차용하면, 이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가 처음 가졌던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흐릿”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정은 연구자에 앞서 지사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던 과거 연구자들의 현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때문에 당사자 운동의 성격 자체가 다르게 전개되고 있고요. 이건 막스 베버가 처음으로 지적한 건데, 그러니까 오늘날 대학, 특히 부설연구소는 “국가 자본주의적 기업”의 측면이 있으며, 이는 연구자들 사이의 독특한 노자관계 형성에 기초합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차용하면, 신진 학술 “노동력의 일반화된 상품화”랄까요. 더군다나 말씀드런 것처럼, 이 자본관계에는 자본논리와 계급갈등만이 아니라 연장자지배적이거나 가부장적인(혹은 남성지배적인) 요소도 가미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계를 대상으로 하는 과거의 학술운동과 오늘날의 그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론 패러다임으로서 문화정치경제학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 모델의 변이로 이해하시면서 ‘얼룩덜룩한 자본주의’(variegated capitalism)라는 개념으로 한국의 발전 모델을 이해하고 연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적 관심 및 선생님께서 이러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지훈 일단 제 잘못이겠지만 제가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얘기부터 드려야 할 듯 합니다. ‘Variegated’나 ‘얼룩덜룩한’과 같은 표현이 사람들의 주목을 과도하게 끄는 것 같아서요. 이 때문에 여러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먼저 번역어에 대해서 말씀드릴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Variegated는 번역이 안 되는 용어입니다. 심지어 독일어나 불어로도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누더기 같은’, ‘다채로운’, ‘얼룩덜룩한’, ‘잡종의’ 등으로 번역되어 오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variegated capitalism과 관련한 첫 번째 발표에 오신 분들이 ‘얼룩덜룩한’이 가장 좋은 것 같다고 제안해서 그렇게 했고요. 최근에는 ‘다채로운’이 좀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그렇게 할 때 다채성이나 다채화(variegation)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어서입니다. 얼룩덜룩함! 이상하잖아요. 이걸 설명드리려면, 원래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원래 이 용어는 variety, 특히 자본주의와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과의 대비 속에서 등장했습니다. Variety라는 것은 빨간 연필, 노란 연필, 파란 연필 등처럼 개별 연필들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고요. Variegated란 하나의 꽃에 여러 색이 섞여있는 것처럼 전체 속의 다양성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하나의 담벼락에 있는 벽돌들의 서로 다른 변색을 묘사할 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오래된 벽처럼) 낡아빠진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꽃처럼) 보기 좋은 색이라는 함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그 자체로 누더기 같다는 걸 함의하거나 채색이 다양해서 보기 좋다는 함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다양성을 서로 독립된 것들 간의 다양성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전체 속의 다양성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이는 결국 방법론적 영역주의, 특히 방법론적 내셔널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인문지리학계에서 과잉지구화 테제와 비교자본주의론 사이에서 공간적 감수성이 높은 새로운 접근을 만들기 위해 제시되었습니다. 이걸 마르크스와 결합하면, 그것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세계시장의 맥락 내에서 다중스케일적인 다양성 혹은 스케일의 상대화 등을 조망할 수 있게 합니다. 때문에, 이는 굉장히 유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방법론적 내셔널리즘과 트랜스내셔널리즘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공간적 관점만 가지고는 구체적인 현실의 발전 모델이나 위기를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분들이 오직 이것에만 주목합니다. 나아가, 이걸 가지고는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어떤 사안을 연구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얼룩덜룩한 혹은 다채로운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특정한 목적 하에서 특정한 사안을 다루기 위해 제시된 개념일 뿐입니다.

한편, 같은 맥락에서 제가 선호하는 이론 패러다임은 문화정치경제학으로 묘사되는 게 보다 타당합니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드릴 수 없지만, 이는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의 통합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내셔널 스케일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차원, 아울러 서로 단절된 분석단위들 간의 비교보다 그것들 간의 복잡합 연결망과 상호 관계 속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조망한다는 맥락에서 다채로운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발전론의 망령에 빠져있다”는 어떤 심사평에 당황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냥 자본축적과 위기, 위기관리, 위기관리의 위기, 거대한 전환, 새로운 자본 축적 전략 등을 구조화, 전략적 행위성, 기호작용의 관점에서 해명하는 것을 선호할 뿐입니다.

이런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학부 시절 제가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경제위기가 발생하는 바람에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습니다. 제게는 균형보다 불균형이, 나아가 시장 메커니즘보다는 ‘거대한 전환’이 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후 그러한 관심이 문화연구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 맥락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쓰고,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모델>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런 사안은 하나의 단일 이론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시도를 잘못 하면 환원주의가 됩니다. 동시에 저는 환원주의를 거부한다는 명목 하에 시도되는 각종 절충주의에도 비판적입니다. 이런 경우는 상당히 기회주의적으로 이뤄집니다. 이 맥락에서 이론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구체-복합에 대한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문화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거대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사회과학철학과 동일한 사회이론에 기반하여 여러 분과학문의 이론적 자원들을 통합한 형태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관심 분야는 발전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또한, 선호하는 이론 패러다임도 얼룩덜룩한 혹은 다채로운 자본주의가 아니라 문화정치경제학입니다.

 

학문의 동기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하셨듯이 저희보다 앞선 세대와 함께 저희도 그 영향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을 문화정치경제학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학술적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이 현실 안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지금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텐데, 이를 학술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에는 어떤 의지나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호기심이나 지적 관심 같은 것도 들어있는 것일테고요, 이런 동기는 어떻게 가지시게 된 것일까요?

 

박지훈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1990년에 서울 관악구로 이사와서 97년에 서강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는데요. 잘 아시겠지만, 1990년대에는 사회적 참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하나가 성수대교 붕괴였고요. 이 때문에 제가 입학한 해에는 당산철교에 대한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산역에서 합정역으로 지하철이 안 다녔습니다. 당산역에서 합정역까지의 마을버스는 공짜로 운행되었고요. 그래서 학교를 가려면, 집에서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 다음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또 다시 지하철을 탄 후 신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걸어서 학교에 갔고요. 가는 도중 출근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요, 8시에 나오나 7시에 나오나 사람은 많습니다. 생산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학교에 가서 경제학 수업을 들었는데, 결국 빈곤을 각자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대학 입학 직전에는 노동법 개악에 따른 총파업이 있었고, 입학한 해에는 경제위기가 발생했으며, 직후에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신자유주의화가 전면적으로 관철되었고요. 그리고 새로운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폭증했습니다. 또한,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부지런했거든요. 이건 노회찬의 6411 버스 같은 겁니다. 심지어 5시에도 마을버스는 꽉 차고 6시에도 꽉 찼는데 말이지요. 또 그래프상의 변화, 얼마 변화하지 않았다는 그 변화에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큰 피해를 보기도 하고요. 결국 제가 당시 배웠던 경제학에는 삶에 대한 얘기가 별로 없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일대를 나온 경제사 교수님께서는 수업 시간에 본인 주식 떨어진 걸 더 걱정하셨어요.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금융경제학 교수께서는 누가 자기 차 운전석 손잡이에 껌을 붙여놨다며 그를 “단병호 같은 놈”이라 욕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말씀드리면, 제가 경제학이 아니라 다른 걸 공부하기로 결정한 마지막 계기는 2학년, 그러니까 4학기 때인가 경제학 수업 시간에 바로 그 커먼즈를 다룰 때였습니다. 환경경제학 중간고사 다섯 문제 중 3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특정 공유지의 비극을 피하는 동시에 최적의 효율성을 얻으려면 해당 공유지에 소를 몇 마리 방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의미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이 문제의 답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정답은 11분의 273마리! 교수님께서 계산을 안 해보고 문제를 출제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사실 이거보다 제가 더 주목했던 사안은 같은 문제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같은 학기에 정치경제론이라는 정치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는 오스트롬을 다루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보면 이게 대비가 딱 됩니다. 이게 제가 전역한 직후 학기니까 2001년 1학기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오스트롬이 노벨상 받기 8년 전이고 이때 이미 정외과 수업에서는 제주도 공유자산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수업 담당했던 류석진 교수님께서는 이런 거 관심있으면 빨리 인디애나 블루밍턴으로 가라고 권유했었는데 그때 수업 들었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안 간 거 같아요. 갔으면 노벨경제학상 받은 이가 지도교수될 수 있었을 텐데.

제가 특별히 오스트롬에 관심이 있어서 정치학을 전공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수업 시간에는 더글라스 노스랑 맨슈어 올슨 등도 다뤘는데, 이 학과에서는 경제학과에서 다루는 사안과 유사한 것을 다른 접근으로 다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외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사회학과보다 정외과에 ‘불온한’ 교수 및 학생들이 더 많았습니다. 진짜로 리버럴해서 이념적 지향 자체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분들도 있었고요. 이후 거기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 썼는데, 쓰다보니 국제정치나 국제정치경제가 너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신)현실주의, 구성주의, (신)자유주의에는 별로 매력을 못 느꼈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보신당에서 일하다 결국 영국 노동당 성향의 정치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나 궁금해서 셰필드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고요. 이런 선택을 했을 때는 학과에서도 이상한 선택을 한다고 했고, 심지어 미국에서 공부하는 다른 학교분들도 말렸습니다. 별 얘기를 다 들었습니다. US Ranking 50위권 넘어가도 되니까 통계하라고. 그런데 그 당시 찾아봤을 때는 미국에 비판적 IPE 하는 데가 없었습니다.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게 알렉산더 웬트 지도교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구성주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다 캐나다로 갈까 영국으로 갈까 하다가 영국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원래는 국제정치경제 하러 갔는데, 지도교수가 마음에 안 들어 고민하던 차에 지주형 선생님 소개로 밥 제솝을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컨퍼런스에서 한 번 더 만난 후 학교랑 전공을 다 바꾸게 된 겁니다. 그때 제가 뭘 하고 싶은지 A4 용지 분량으로 7장 정도, 대략 2,000단어 넘게 써서 보냈는데 제솝이 한 700단어 정도의 답장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지도교수와의 수준 차이가 느껴져 학교를 옮겼고 이 때문에 졸지에 사회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랑카스터 가서는 결국 하고 싶은 거 했습니다. 제솝이 가장 먼저 읽게 했던 것은 베버의 <경제와 사회> 일부와 <일반경제사> 4부였습니다. 베버와 관련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 밖에 모른다는 이유로요. 그리고 학위 과정 동안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작업했던 건 세계시장과 헤게모니라는 문제였고요. 그러니까 결국 저는 하고 싶은 걸 한 거죠. 이건 상당히 새로운 해석이고, 현재 12,000 단어의 학술논문으로 써놨는데, 아직도 투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고민이 많고 분량이 안 줄어 듭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문화정치경제학이나 다채로운 자본주의와 연결하고, 그 맥락 내에서 한국의 발전에 대해 썼고요. 발전에 대해 쓴 건 그게 석사 학위 논문과 연결되기도 하고, 원래는 석사 학위 논문에서 다룬 시기 이후의 것을 하려 했는데, 역사적 배경을 쓰다가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졸업할 수도 있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얼룩덜룩한’이나 ‘발전’과 같은 표현에 좀 더 주목하는데, 제 입장에서는 그냥 해방 후 한국 정치경제의 변화를 축적, 위기, 전환을 중심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그 작업이 저와 주변인의 일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자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에서 정치학으로 그리고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어오셨다고 할 수도 있을텐데요, 어찌 보면 문화정치경제학이 어떤 도식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삶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문제의식 속에서 선생님의 관심사가 확장된 결과이지 않을까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박지훈 네. 그리고 좀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를 일종의—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미적분같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의 구체성과 복합성을 온전히 재현하는 단일 이론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합리적 추상화를 통해 그 단면들을 각각 분석하고 그것들을 종합하는 겁니다. 영어로 쓰면 좀 더 편한데, differential analyses와 그러한 analyses에 대한 integral synthesis. 이 때문에 한편으로는 환원주의도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충주의도 반대하는 겁니다. 특히, 절충주의는 칸트, 피히테, 헤겔, 마르크스와 엥겔스 모두가 혹평을 남겼거든요. 요즘에는 유행하지만. 또한, 무의식적으로 혹은 기회주의적으로 채택되지만. 그리고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초기의 비판적 실재론, 특히 실재의 층화와 분화에 대한 논의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고요.

 

연구적 관심과 연집 활동의 관계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연구적 관심과 연집 활동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앞에서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연집 활동은 학문 자본주의 시대 학계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운동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 일반, 특수, 나아가 한국의 고유한 자본주의의 진화와도 관련이 있거든요. 신경제라 부르든, 지식기반경제라 부르든, 창조경제라 부르든, 4차 산업이라 부르든, 정부 관료를 기준으로 하면 노태우 정부 말기, 정치인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 YS 때부터 정당을 가리지 않고 다 비슷한 얘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여간, 제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고등교육 및 연구의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변화와 국가 개입의 형태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산학관 삼중 나선으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건 고등교육 및 연구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문제이고, 동시에 그것은 경쟁력과 같은 담론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건 국가만이 아니라 도시도 마찬가지고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연구 관심과 연집이 연결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함으로써의 앎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적분적 종합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이론적 종합이 현실 정합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메타이론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게 있으면 방구석이든 상아탑이든 안 나와도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해봐야 하는 거죠. 이런 면에서 제 마음 속에서는 정주영이나 이명박같은 인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해봤어?”라고 물어보는. 물론, 마르크스도 헤겔 철학 가지고 프로이센의 도농문제나 산업화, 국제무역이 해명되지 않으니 공론장에서 물어나서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잖아요. 그렇게 해야할 때가 있는데 전체적인 삶 속에서는 ‘해봤냐’라는 문제가 이런 입장에서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건 마르크스가 근대 통계학의 아버지인 아돌프 케틀레를 비판할 때도 나오는 문제거든요. 통계 가지고 규칙성을 발견하고 그에 기반하여 예측에 성공하는 거 정말 뛰어난 건데, 그러한 규칙성을 야기하는 인과성을 이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사회적 실험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하거든요. 그러면 그 어떤 변화도 만들기 어려운 거죠. 이런 맥락에서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내적 인과성에 대한 규명이 없다면 과학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고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잘 알려져 있고. 하여간, 범죄율 등과 관련하여 케틀레는 이미 1820년대에 통계적으로 매우 놀라운 업적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것이 인과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규명으로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기존의 성공을 다른 사례에 적용하는 데 그쳤다고, 따라서 1830년 이후 케틀레는 발전한 게 없다고 평가합니다. 사실, 이런 게 학문적 활동에 대한 제 관점에 영향을 미친 거죠.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는 이 사람이 19세기의 맥락에서 무슨 생각했는지에 대해 디테일하게 읽는 게 재미있어 하기도 합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재밌지 않습니까? 케틀레에 대한 마르크스의 평가. 이런 것을 보는 과정에서 아직 이론으로 발전하지 않는 통찰 같은 것들을 얻을 수도 있고요. 마르크스 얘기하면, 사람들이 맨날 구조주의가 어쩌고, 경제결정론이 어쩌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어쩌고 하는데, 그건 좀 지겨워요.

 

연집의 향후 활동에 대한 고민 및 향후 학술적 실천의 과제

 

진행자 선생님의 연구적 관심과 관련하여 연집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여러 활동들 이외에 추가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활동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연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한국학계에서 담당해야하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이건 앞에서 말씀드려서 따로 답변드릴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다만, 저는 현재 하고 있는 여러 활동들 이외에 무엇을 추가적으로 더 추진해야 되는 게 아니라, 현재 하고 있는 활동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거나 재정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연집 학술부에서 활동하는데요, 말씀드린 것처럼 최근에는 연집에서 하는 활동들이 너무 많고 그 모든 사안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 가지만 추가하면 제가 부산 내려와서 느낀 건데 사회운동의 서울 중심주의에 대해서도 좀 더 심도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자본축적 전략이 그러한 것처럼, 사회운동의 스케일적 대상도 ‘내셔널’ 스케일이 과거와 같은 지위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거든요. 예컨대, 부산이나 다른 도시들에서도 커먼즈가 서울과 같은 수준의 중요성을 가질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여기서는 시장에서의 사적 재화냐 커먼즈냐보다 서울수도권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긴 이념적으로 ‘향토지역주의’가 가장 강한 것 같아요. 이건 진보와 보수 등을 포괄하는 일종의 엄브렐라 이데올로기(umbrella ideology, 포괄적 이데올로기)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는 민족주의도 약할 수 있습니다. 반일? 여긴 일본이랑 굉장히 가깝습니다. 평범한 30대 여성이 후쿠오카에서 제일 큰 백화점 ‘게스트 카드’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이 지역에서 최근 고민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부울경에 세워진 원전을 무기(?)로 전력 가격을 거리에 따라 차등화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서울 수도권 기업들의 생산비용을 높이겠다는 거죠. 이렇게 해서 서울 수도권 기업의 부산 이전을 노리는. 지금 딱 정리하기는 어려운데, 학술운동의 차원에서도 이러한 스케일, 영토성 등의 변화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선생님께서 향후 학문적 과제를 포함하여 학술적 실천의 과제로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지훈 저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사회과학자고요. 이 맥락에서 저는 이론 고찰과 경험 조사가 양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과학연구를 지향합니다. 일단, 관찰은 이론적재적(theory-laden)이고, 이론은 가치적재적(value-laden)이기에, 한편으로는 ‘이론에 의해 그 형태(내용의 조직화 양식)가 부과된 경험연구’를 선호합니다. 나아가, 어떤 경우든 이론은 현실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는 제 아무리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이론이라더라도 현실의 구체성과 복합성을 이론이 다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론의 발전에 앞서 현실이 먼저 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는 ‘이론에 형태를 부과하는 경험연구’도 선호합니다. 둘 중 후자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데, 전자는 후자의 논리적 선제조건이기 때문에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일종의 대원칙이고, 이론 패러다임과 관련해서는 말씀드린 것처럼 문화연구와 정치경제학의 실재론적 통합을 선호합니다. 지역과 관련해서는 한국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환태평양, 그리고 지구 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요. 이 맥락에서 제 경우 작업은 해방 후 한국 정치경제에 대한 일관성 있는 해명인 것 같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역사학적인 게 아니라 현재로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정치경제도 포함됩니다. 이 때문에 프로토콜 자본주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사안과 관련해서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여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건 어떤 단일 이론 패러다임으로 수행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저는 정치이론, 제도주의적 경제이론, 그리고 문화연구에 포괄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론에 부과하는 경험연구라는 차원에서 문화정치경제학 자체를 개선하고 싶고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만약 훗날 제가 디지털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본주의 거버넌스의 (불)가능성을 다룬다면, 그땐 여전히 그 전통 하에 있겠지만 지도교수의 그늘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서 새로운 걸 하는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의 현실에서 보통사람들의 일상사, 특히 계급/계층을 포함한 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직업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인식론적으로 프래그마티스트이고요. 이 맥락에서 학문적으로는 경험적 현상, 특히 피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인과성 규명을 목표로 하고 현실에서는 그러한 인과성 제거를 위한 사회적 실험을 통해 지식의 타당성을 시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제게는 이게 해방적 사회(과)학입니다. 이런 건 앤드류 세이어에게 배운 건데, 그는 해방을 피할 수 있는 고통(avoidable suffering)에서 온존(well-being)으로의 이행(transition)으로 정의하더군요. 때문에, 해방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저는 이를 웰빙의 사회(과)학이라 부르고 싶어요. 저에게 있어서는 학술운동이 이 맥락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저는 ‘인생 이모작’ 같은 표현을 안 좋아하는데, 장인정신(artisan spirit)을 가지고 끝까지 이 해방적 사회(과)학 혹은 웰빙의 사회(과)학만 하다가 가면 되는 거 같아요. 똘똘해서 이걸 빨리 성취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게 안 되니 요즘 들어서는 오래 살아서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끝으로 이런 저런 고민 끝에 글 쓰는 걸 질질 끌던 제게 해준 지도교수의 말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일단 써라. 써야 수정 가능하다. 수정해야 출판할 수 있다. 출판해야 읽힐 수 있다. 읽혀야 논쟁의 중심에 들어설 수 있다. 논쟁의 중심에 들어서야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니 일단 써라.” 이런 게 제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느슨한 가이드라인 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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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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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애

    잘 봤습니다. 논문 분량의 글에 질문자와 답변자 모두의 촘촘함과 진정성이 넘치네요. 고맙고 공부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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