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집 회원 인터뷰5 (김민환 운영위원)

활동소식

인터뷰일시 : 2022년 10월 19일(수) 오후 3:00 ~ 4:00

장소 : 줌 온라인

인터뷰이 : 김민환 (연구자의 집 운영위원, 한신대 평화교양대학 부교수)

진행 : 박서현 (연구자의 집 미디어팀,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전임연구원)

구자의 집과 연구자 권리선언

진행자 :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이하 연집)은 “실천적 아카데미즘의 정신으로 신자유주의 지식 생산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적 지식커먼즈를 구축하고 연구자들의 복지와 권리 증진을 이루기 위해 지난 2019년 1월 26일 창립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연집의 창립에 참여하시고 연집의 상을 함께 만드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집에서 활동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저는 2018년 연집 준비모임에 합류했습니다. 연집의 현 운영위원장이신 박배균 선생님이 권하셨고 제가 연집 활동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2018년 12월 연집 창립 준비의 성격을 가졌던, 민교협 아카데미 주최 학술대회 ‘새로운 학술운동과 연구자의 집’에서 「‘연구안전망’ 구축과 연구자 상호부조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습니다. 당시 제 발표는 연구안전망, 연구자 상호부조의 아이디어를 제안·공유하는 성격을 가진 간략한 발표였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한신대학교에 취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대학 안에서만 계속해서 연구를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대학 밖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모색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유학을 가지 않고 국내에서 박사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겪는 문제들을 고민했고 이 문제들을 제도적·구조적으로 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연집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연집에는 여러 연구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구상이 있었습니다. 연집이 현재 만들고 있는 ‘R 커먼즈 합정’ 같은 것을 만들자고 구상했던 것인데요, 이 구상은 연구자가 대학 밖에서 자료도 찾고 교류도 하는 식으로 연구자 생애주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모색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공간의 상은 이미 오래전에 제안된 것이기는 합니다.

현 서울시 교육감인 조희연 선생님이 사회적 상속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가 위 구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상의 연장선상에서 저는 연구자 상호부조와 연구안전망 구축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밖에서 연구자가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연집이 제가 처음 고민했던 연집의 상이었습니다.

진행자 : 연집은 소정의 절차를 거쳐 사단법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연집이 법인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의 창립선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집은 학술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학술운동단체라는 점에서는 법인화 절차를 밟지 않은, 예컨대 지식공유연대 같은 조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집이 사단법인이 되었어야 할 필요가 무엇이었는지, 법인이 됨으로써 연집의 학술운동이 다른 학술운동단체의 그것과 비교하여 다른 면모를 가지게 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연집이 법인이 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연집이 구상했던 공간의 연장선상에서 연구자 사회주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연구자 사회주택에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유공간들이 있을텐데요, 연구자 사회주택의 관리·운영을 위해서는 법적 지위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연구자 사회주택은 연집이 한국토지주택공사(이하 LH)에 제안하여 LH의 연구자 임대주택 사업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LH를 지속적으로 상대할 뿐 아니라 이후에는 교육부를 상대할 때 연집이 임의단체로 있을 경우 LH, 교육부와 법적으로 안정적으로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연구자 사회주택이 실제로 만들어졌을 때 관리 주체들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법적 지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점이 연집이 법인화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많은 분들이 연집에 매달 회비를 내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일시금으로 꽤 많은 돈을 내신 분들도 있으셨습니다. 이분들께 연말정산 등에서 일부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법인이 아닌 지정기부금단체가 되는 방안도 있었지만 공익법인으로 지정받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안이었습니다.

연집이 법인화되는 데 제가 관여했던 것은 제가 속한 학회가 연집이 법인화되기 1년 전 법인화되었는데 이때 제가 실무 총책임자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법인화 과정을 경험하여 절차 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집이 법인으로 전환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행자 : 말씀 감사합니다. 창립 이후 연집은 ‘연구자 권리선언’ 초안을 마련한 다음 대학원생 노조,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민교협, 학단협 등과의 토론회를 거쳐 최종본을 확정하고 2021년 11월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연집 운영위원이신 박철현 선생님과 함께 연구자 권리선언 전문의 초안을 작성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안 작성 시 주안점을 삼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아울러 연구자 권리 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연구자 권리선언은 LH에 제안한 연구자 사회주택을 LH에 설득해야 할 필요에서 출발했습니다. LH에 연구자 사회주택에 대해 얘기했을 때 LH에서 왜 연구자를 위한 사회주택을 만들어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얘기를 하다가 연구자라고 했을 때 그들은 교수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대학교수를 위한 사회주택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연구자의 상과 자신을 연구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구자의 상 사이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러면 실제로 사회주택이 만들어질 경우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범주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범주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먼저 헌법이나 법조문에 연구자라는 단어가 나오는가를 찾아봤는데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저는 한국에서 연구자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역사적·문화적·사회적인 범주로서의 연구자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술인 복지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헌법에 저작자, 발명가, 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가 법률로써 보호돼야 한다고 나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헌법 제22조 ①) 헌법을 근거로 하여 이들은 국가, 사회에 필요한 존재니까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연구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했다거나 법에 명시되어 있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먼저 우리 스스로 누가 연구자인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집이 당시 생각했던 연구자는 풍족한 연구자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 분야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연구해 가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연구자로 생각하지 않는 분이 생각하는 연구자의 상과는 격차를 좁히면서 우리 스스로 연구자 범주를 어떻게 만들 것이며 나아가 연대의 틀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 분들의 공통점을 찾아봤습니다. 예컨대 비정규직 교수와 정규직 교수, 정규직 교수 중에서도 비정년 트랙 그리고 대학원생, 아울러 대학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연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등이 있었는데요, 이들을 묶을 수 있는 범주로서 연구자가 누구인가를 정리해 보자는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큰 논쟁점이기도 합니다. 연구자란 누구이며 어디까지를 연구자로 규정할 것인가가 논의과정에서 굉장히 논란이 됐던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연구자 권리선언 전문의 초안을 썼는데요 사실 저는 굉장히 구체적인 역사적·현실적 맥락 속에서 연구자 권리선언이 나왔다는 것을 밝히고자 애를 썼습니다. 몇몇 분들은 더 추상화하여 보편적 선언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지만 저는 정공법으로 현재 상황에서 연구가 우리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라면, 아니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면, 연구자가 지금 소멸되고 있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된다는 것을 제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연구자 권리선언을 하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드러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다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연구자의 권리를 강조하고 연구자가 누구이며 연구자의 사명은 무엇이고 연구를 하기 위한 안정적 환경은 무엇인지를 정리하는 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연구자 권리선언에는 1,700명 가까운 많은 분이 서명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연구자는 이런 존재들이며, 이들이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 ‘연구의 권리’가 아닌 ‘연구자의 권리’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집단적으로 알렸다고 생각해요. 제가 알기로는 서울대 영문과의 김명환 선생님께서는 ‘연구진흥법’을 고민하셨습니다. 어느 것이 사회적으로 더 인정을 받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경험에 비춰볼 때 저는 연구진흥을 한다고 해서 연구자에 대한 대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구자를 보호하는 것이 결국 연구를 진흥하는 핵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구자 권리선언에 많은 분들이 서명을 해주셔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제3회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2022.10.7.)

 

연구자 범주의 정립과 연구자 복지법의 의미

진행자 : 연구자 권리선언을 성안할 때 결국 주체의 문제, 누가 연구자냐는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연구자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맞지만 연구자 복지법의 법제화를 고려했을 때 연구자의 범위를 좁힐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금이 연구자 범주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인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 사회에 연구자는 존재해왔고 연구활동도 존재했는데 많은 연구자가 그들 삶의 재생산이 불안정하게 된 상황에서 연구자 범주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제가 91학번인데요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학생은 지식인이니까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어야 돼’라고 선배들이 제게 책을 보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때까지는 대학생이 지식인이라고 호명됐던 것 같습니다. 저도 후배들을 지식인으로 호명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구조적 원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또래 집단에서 대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또래 집단의 30%만 대학생이 됐습니다. 그전에는 더 낮았습니다. 그래서 저 때만해도 대학생이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전대협의 마지막 세대인데 ‘백만학도’라고 호명했습니다. 대학교 1·2·3·4학년 다 합쳐 백만학도면 대학생이 아닌 또래 집단 300만 명이 있는 것이었는데요, 동질성을 가지는 백만을 묶어 대학생이라는 집단을 만든 것이고 이들을 지식인이라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묶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 이후 대학 입학 정원이 자율화되면서 사실상 100%가 대학에 가게 되는 구조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학생이 모두 다 같은 대학생이 아니게 됩니다. 1990년대 후반의 대학 서열화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지식인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효과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효과를 증폭시킨 것 중의 하나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성립한 학진체제입니다. 학진체제가 국내 학술시장과 학술상황에 여러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이를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저는 동의는 하지만 이는 굉장히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넌 지식이니까 이런 책을 읽어야돼라고 했던 말은 대학생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책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들이 지식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진체제가 성립하면서 더 이상 책을 쓰지 않게 됩니다. 논문을 써야 되니까요. 지식인들은 책을 썼는데요,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겠지요. 학진체제 속에서 이 체제에 영향받는 사람들은 책을 안 쓰는 것이고 책을 읽은 독자도 사라지는 식으로 지식인이 사라졌고 학생 지식인인 대학생도 사라졌습니다. 이는 출판시장의 문제 등 다른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이라고 스스로를 부르지 않지만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연구자들인 것입니다. 학자 등 다른 이름도 모색되었지만 결국 연구자라는 이름이 선택된 것 같습니다.

대학 교수에서 시작하여 대학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아가 대학에서 학위 등의 보증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기는 연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묶을 수 있는 정체성으로서 연구자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닌 상황에서 연구자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도 대등하게 연대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연구자가 역사적·사회적 범주일 수 있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후대에는 연구자 권리선언이 이를 보여주는 문구로 인용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지식인과 연구자의 구분은 연집의 학술운동과 관련해서 다시 얘기되지 않을까합니다. 연집은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한 이후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2년 4월 20일 제1회 토론회와 7월 6일 제2회 토론회, 10월 7일 제3회 토론회가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행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구자 복지법의 의미가 무엇이며 연구자 복지법 제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어려운 문제인데요, 연구자 권리선언에 대해 설명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 중 하나는 연구자를 왜 도와줘야 하나였습니다.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었는데 왜 도와줘야 하는가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연구자가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며 보호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연구자의 대표로 정규직 교수가 재현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연구자하면 떠올리게 되는 어떤 집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구자라면 교수 혹은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안정적 직장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이들은 굉장히 소수이지요. 특히 인문사회계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연구자 중 많은 수는 불안정하게 연구하는 사람들로서 굉장히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강사법의 경우에도 강사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려내는 것이 중요했는데요, 많은 강사분들의 죽음 등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연구자의 범주에 이분들을 포함할 뿐 아니라 이분들보다 사회적·제도적으로 더 보호받지 못하는 많은 분들까지 포괄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연구자라는 말이 정규직 교수 혹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명칭으로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연구자들의 이야기이지 않을까합니다. 저는 국내 대학원에서 연구자가 되는 과정을 밟는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에 있으면 유학을 가라는 얘기를 계속해서 듣게 되는데요, 유학을 갔다 오면 무엇인가가 해결되어 있으며 자리가 보장돼 있다는 혹은 보장될 가능성이 높다는, 또 유학 간 곳에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얘기를 듣습니다. 그렇다면 유학을 가지 않고서 국내에서 연구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사실 대학원을 운영하는 대학들, 이러한 대학에 소속된 모든 교수들이 고민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현재의 고통에 대해 참는 견디는 식으로 문제를 덮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계를 넘으면 지금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요. 문제가 발생한 시점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어떻게든 견뎌서 다음 단계를 가면 마치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넘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과연 국내에서 연구자를 키우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학금만이 아니라 결혼, 대출 등 또래들이 생애주기 속에서 제도적으로 해결해 가는 문제를 연구자들이 그들의 생애주기 안에서 같은 사회구성원으로서 해결해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연구자 복지법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 중에서 제일 가슴을 울렸던 토론회는 최근 있었던 제3회 연구자 복지법 토론회 ‘그 많던 여성 연구자는 어디 갔을까: 교육학문공동체와 마미 페널티(Mommy Penalty)’였습니다. 마미 패널티는 모든 직종에 다 있을지 모르지만 여성 연구자에게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많던 여자 대학원생이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에서 지원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구조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담을 사회적으로 나눠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하지 않으면 국내 연구생태계가 망가진다고 생각하고요.

이는 분명 굉장히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급함이 사실 다른 분야의 시급함보다 더 시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연구자 복지법의 위상을 어디에 둘 것이냐가 제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자 질문이 제기되는 지점이지 않을까 합니다.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특권적으로 이를 주장할 수 있는가, 우리보다 훨씬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연구적 복지법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가장 고민이 되는 지점이자 연구자 복지법을 함께 모색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의선 공유지의 투기적 개발 중단 및 시민 자치 공유 공간으로의 전환을 위한 기자 회견(2019.4.23.)

 

당사자운동으로서의 연집의 학술운동

진행자 : 말씀해 주신 것에 공감이 됩니다. 저도 연구자인데요 우리만 특수하다고 할 수 없고 연구자 복지법의 위상을 보편적 가치로서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가 고민이 됩니다. 이제 연집의 학술운동에 대해 문의드리고자 합니다. 연구자 권리선언 발표와 연구자 복지법 구상은 연집의 대표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연구자의 권리·복지에 초점을 맞춘 연집의 활동은 예컨대 1980년대 후반의 한국 학술운동과는 구분되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이전의 학술운동과 구분되는 연집 학술운동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저는 연집 학술운동이 당사자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연구자라는 말을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봐야한다고 말했던 이유와도 관련이 되는데요, 말씀드렸듯이 이전의 학술운동은 지식인운동이었습니다. 지식인운동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굉장히 컸습니다. 저는 그런 공간들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로서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무언가를 발언하는 형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 동료 연구자들 및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발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상황이 좀 낫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자운동은 당사자운동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계신 분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당사자운동의 위험은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기주의적 성격을 가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연집이 2021년 6월 민교협 등과 공동주최한 학술세미나 ‘학술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방과 비제도권의 목소리’에서 연집 운영위원이신 장훈교 선생님이 학술운동의 세대를 구분하며 발표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장훈교 선생님이 1세대 학술운동의 당사자가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고 얘기했을 때 방청자였던 김명환 선생님이 발끈하시면서 선생님 주변에 여성 연구자가 많았지만 이들 중에 자리를 잡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발언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연구자운동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도 연대가 가능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전에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으로 지지 발언을 했다면 이제는 당사자로서 비슷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과 연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연집은 이러한 연대의 통로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저의 고민입니다.

진행자 : 당사자운동으로서 연집의 학술운동을 자리매김할 때 당사자운동이기 때문에 연대의 가능성도 열리지만 동시에 당사자운동이기 때문에 좁아질 수도 있는 측면이 있다는, 당사자운동의 힘을 획득하려면 다른 성격을 가지는 운동과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성격을 가지는 운동과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저는 연집이 두 차례에 걸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경의선 공유지운동에 참여하여 주목을 받았는데요, 경의선 경유지에서 이미 활동해 오셨던 분들이 있었지만 연집이 결합하면서 생긴 시너지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의선 공유지와의 연계는 연집이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것이 이후에 연구자 사회주택 논의로 이어졌는데요, 연구자 사회주택이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구자 사회주택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 연구자 사회주택도 왜 지방이 아니라 서울이냐고 항의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답변을 할 수 있었던 경우 서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전국적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다시금 그렇다면 전국적으로 하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연집은 외부 단체들과 연대하여 성명을 내는 등의 활동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자만 주택 문제를 겪는 것이 아니지요. 다른 사회주택들의 확대를 지지하고 또 연구자로서 이러한 지지의 논리를 만들며 사회주택이 확대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연구자 사회주택이 한두 개라도 이미 건축되었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답답한 부분입니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는데요, 돌파구가 무엇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돌파구는 분명 있습니다. 현재 이런저런 통로로 서너 개의 연구자 사회주택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것이 좋은 모델로 정착되고 다른 사회주택으로도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사회 활동가들이 공익적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 즉 활동가가 연구자의 정체성을, 나아가 또 연구자가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중요하지 않을까합니다. 아울러 연구안전망 이외에도 연구자 상호부조의 문제를 생각했을 때 저는 상호부조의 범위에 사회단체에서 정책을 고민하는 분들이 포함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교차 가능성을 키워갈 때 연대의 공간이 더 크게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연집과 사회적 기업 (주)어울리와의 업무협약(2021.10.23.)

동아시아의 역사·사회에 대한 연구의 의미와 연집의 향후 과제

진행자 : 말씀을 들으면서 경의선 공유지 운동과 결합하면서 운동에 새로운 빛깔이 생겨나고 연집에서도 다른 고민들이 이어지면서 변화해가는 식으로 상승작용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질문은 연집과도 관련돼 있지만 선생님의 개인 연구와도 관련돼 있는 질문일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아시아의 역사·사회에 대해 연구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타이페이, 제주의 역사·사회를 연구하시면서 전쟁·평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먼저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역사·사회에 대해 연구해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학술적 연구·관심이 연집의 활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제주·오키나와·타이페이의 평화기념공원 형성과정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학살, 국가폭력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했었데요, 연구과정에서 동아시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성격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연결해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연구를 하면서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저는 방법론적으로 비교연구보다는 관계연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 혼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연집 운영위원이신 정영신 선생님 등과 함께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팀 작업을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정영신 선생님의 경우에는 예컨대 오키나와 한국 그리고 필리핀의 미군기지들이 어떻게 안보의 분업구조를 이루는가를 연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동아시아가 서로 연동되어 있으며 비슷한 운명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생성된 어떤 힘에 의해 이러한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구조는 아주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형태, 폭력의 대결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이를 잘 풀어내지 않는다면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동아시아 체제가 더 평화적·민주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충돌이 일어났을 때 피해가 집중되는 지역은 과거에 피해가 있었던 곳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제주와 오키나와, 타이페이에서 1945년부터 50년 사이 일어난 국가폭력을 연구했는데요 향후 폭력이 세 군데에서 다 발생하지는 않을지라도 위험들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구조들을 잘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각 국민국가의 성격 및 각 국민국가 위에서 어떤 공통의 행위자로 작동하는 미국의 문제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역에서 제기되는 대안적 담론과 관련하여 저는 탈분단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통일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데요 탈분단의 여러 방법들 중의 하나가 통일이지 통일이 원칙이고 나머지 것들이 통일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컨대 각자 독립국가로 되어 교류하는 방식까지를 포함하는 탈분단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제가 배웠던 것은 반복귀였습니다. 복귀는 일본 국민국가와 하나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아닌 형태, 자립과 같은 형태의 반복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립의 방법에는 예컨대 일국 안에서의 자립이냐 독립이냐 아니면 또다른 형태이냐 등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대만의 경우에는 대만 내부에서의 대안적 담론이 없습니다. 통일이냐 아니면 독립해서 대만공화국(Republic of Taiwan)이 되냐의 논의밖에 없어서 다소 아쉽습니다. 만약 그게 있었다면 제가 키워드로 ‘탈분단’과 ‘반복귀’ 그리고 ‘OOO’와 같은 식으로 썼을텐데요, 대만의 경우에는 이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처럼 저는 과거를 연구했지만 현재의 정세도 연구하고 있는데요, 저는 연집의 활동이 국민국가의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직하셨던 김진균 선생님이 은퇴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쓰신 논문이 「자본과 근대국가에 내재한 폭력을 넘어 정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상자이생을 검토함」인데요, 저는 이 문제가 연집 활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행자 : 말씀 감사합니다. 연집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여러 활동들 이외에 추가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활동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연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한국 학계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제가 여력이 있다면 해보고 싶은 것은 연구자 공제회와 연구자 퇴직연금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민연금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아니라 예컨대 제가 사학연금에 가입되어 있는 식으로 연구자 퇴직연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구자 복지법이 제정된다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도 연구기관인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면 개인, 즉 대학원생으로서의 개인과 학교 그리고 국가가 각각 1/3씩을 적립하는 식 등의 제도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직원 공제회가 가지는 기능과 같은 기능을 가지는 연구자 공제회의 형태로 연구자의 연대를 확대해가는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연집에서도 이러한 고민이 있는데요, 저는 이러한 고민과 이에 입각한 실천을 계속해서 하고 싶습니다.

진행자 : 연구자 공제회원이 돼서 연구자 퇴직연금을 받고 싶습니다. (웃음)

김민환 : 실은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요 (웃음) 퇴직금만이 아니라 대출 등도 큰 문제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이 2018년 12월 제가 발표할 때 같이 발표했던 독립연구자께 독립연구자를 어떻게 정의하세요 물었더니 사회안전망으로부터 독립된 것이 독립연구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신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절한 이야기로 와 닿았습니다. 독립연구자를 포괄할 수 있는 연구자 공제회, 연구자 상호부조가 필요합니다. 연구자 사회주택도 필요하고요. 여하튼 모두 다 했으면 좋겠고 연집이 그 정도 사업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대표성과 조직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후원도 더 해 주시고 관심있는 분들은 참여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동운동 영역에서는 예컨대 성수동에 ‘봉제공제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방송작가들의 모임 등의 흐름이 있습니다. 연구자의 경우에도 연금을 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누군가는 해야 되는 데요 쉽지만은 않은 일이지요. 저는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고 이에 힘을 보탤 생각도 있습니다.

진행자 : 너무 좋은 아이디어이고 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향후 학문적 과제를 포함해서 학술적 실천의 과제로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민환 : 저는 역사사회학자이고요 문화사회학자이기도 한데요 최근 일단의 연구자들이 1950년대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국가가 재정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국가가 담당해야 되는 기본적 복지를 민간에 넘겼습니다. 저는 교육·의료·복지를 민간에 넘겼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지금의 사학재단이라고 할 수 있을 문교재단에 교육을 넘겼고 그다음 의료를 의료재단에, 복지를 복지재단에 넘겼습니다. 가장 안 좋은 형태가 형제복지원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것을 못했기 때문에 민간에게 하라고 넘기면서 세제 등에서 혜택을 줬습니다.

국가 규모가 커지면서 민간에 넘겼던 것을 회수했습니다. 제일 먼저 회수한 것이 의료였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를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재단 중 예컨대 부산의 몇몇 분들이 만들었던 정말 훌륭했던 모델이 건강보험의 모체가 됐습니다. 그다음 사립 초·중·고등학교를 국가가 지원금을 주면서 경영 관련 부분을 회수했습니다. 교육 영역에서 초·중·고등학교의 경영을 회수했고 그다음 유치원을 시도했지만 난리가 났었지요. 그럼에도 일정하게 개입해서 유치원의 공공성을 강화하게 됐습니다. 대학이 남아 있는데요 대학은 회수에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 복지가 남아 있는데요, 저는 이것이 제일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 복지가 민간에 넘어가게 된 연원을 잘 풀어내는 형태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문화사회학과 역사사회학에서 사회적 기업의 재현의 문제들이어서 이를 배경으로 하여 심화된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집에 계신 분들과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서 문제의식을 함께 키워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 오늘 인터뷰가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적 시각에 입각하여 사회적 맥락 속에서 연집 활동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라는 점을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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