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도시사업] 시민강좌 ‘글로컬 인문학으로 사유하기’ 2차 강연 “타이베이의 두 얼굴” 강연후기 (김봉준, 국립대만대학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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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잊혀진 역사, 잊혀진 관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세계인의 눈은 한편으로는 유럽으로, 또 한편으로는 타이완과 중국으로 쏠리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해협을 사이의 긴장 관계는 우리가 아직도 냉전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리 또한 그 그늘 속에 함께 있기도 합니다.

올해는 한중수교 30주년입니다만, 한편으로는 한국과 타이완이 단교를 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1992년의 단교는 한국과 타이완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타이완은 1948년 최초로 대한민국의 정부를 인정해준 국가입니다. 여기에 한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임시정부를 도와주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총통이었던 장개석 부부와 정부의 요인들에게 특별히 훈장을 수여해주기도 했습니다. 1992년 단교 이전까지 한국과 타이완은 단순히 우방국의 차원을 넘어서 형제와 같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민간 차원의 교류 역시 활발히 진행되며 서로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끊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국의 단교는 양국의 물리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마저도 단절시켰습니다. 한국은 북방외교의 실시 하에 당시 국제정세와 자국의 이익을 고려하여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타이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륙의 정부가 점점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대신 차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형제의 국가라고 여겼던 한국의 변절은 배신감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 단교가 선포되던 날, 중정기념당 부근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는 항의하러 온 시민들로 대사관 앞 거리가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하니 한국에게 느꼈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이루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무튼 단교로 인한 양국 교류의 단절은 곧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몰이해는 쉬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단교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서점가에는 타이완과 타이완사에 관한 많은 교양서적이 나와 있습니다만, 대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리 깊지 않아 보입니다. 더군다나 타이완학자의 책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현재 세대에서 한국인의 관점을 반영한 타이완을 보는 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난 강연에는 무엇보다 “우리는 타이완의 어떤 점을 알고 싶어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현재 타이완학계와 타이완 사회의 동향을 한국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잊혀 가고 있는 한국과 타이완과의 우호 관계를 복원하고 되짚어 보고 싶다는 제 희망도 담고자 했습니다. 또 이러한 시도는 한편으로 이러한 시도는 제가 2009년 타이완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후부터 가졌던 질문에 대한 결과물이자, 예전의 저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이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한 나라입니다. 우선 언어에 있어서도 타이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민남어의 한 갈래인 태어(台語, Tâi-gí/Tâi-gu)와 객가어, 원주민의 고유 언어가 존재합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출신과 종교 역시 다양성을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이 인정받고 있는 사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연에서는 최근 타이완사의 연구 경향을 반영하고 역사의 기록이 나타나기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시작하여 타이완 역사의 흐름에서 타이베이가 어떻게 성장하고 역사에 그 이름이 부각 되기 시작하였는지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17세기에 이르면 유럽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여파가 타이완에도 미치게 됩니다. 타이완의 남부 도시 타이난에는 네덜란드인이 나타났으며, 이후 타이완은 처음으로 식민 통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희대의 영웅인 정성공이 등장합니다. 정성공은 명나라의 황태자를 받들고 반청복명(反淸復明, 청나라에 저항하고 명나라를 되돌리자)의 기치를 내걸면서 영웅적인 서사시를 그려 나갑니다.

결국 정성공의 정권은 그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다만 정씨 정권이 멸망했다고 해서 청나라가 타이완을 온전히 통치하고 타이완 사람들이 얌전히 청나라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의 느슨한 통치로 인해 타이완 사회는 자력구제의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또한 대륙에서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황무지의 개척도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18세기 이후 시기는 타이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각층의 변동이 활발하던 시기였으며, 지금의 타이완 사회와 문화의 초석이 다져진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학계는 정성공 정권이 멸망하고 타이완은 청나라의 판도에 들어가면서, 타이완을 평정하고 그 사회 역시 안정화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타이완의 기층사회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한국학계는 중국이나 미국 학계의 설명에만 의존하면서 타이완 학계의 동향과 역사 인식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근대에 이르면 타이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당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1895년 청나라와 일본 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함께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과 타이완을 외세를 막아내는 방파제로 생각했지만, 전쟁의 패배로 두 나라는 함께 일본의 영향력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할양되기 직전 타이완의 지방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당경숭은 마지막까지 청나라에 충성하고자 대만 민주국을 급히 세워 일본으로의 할양을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오히려 청나라 정부는 대만민주국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국의 이익과 연관되는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데 한목소리를 내었던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서구국가들도 대만민주국을 외면합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외면 속에서 타이완은 한국보다 15년 앞선 189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됩니다. 정치 및 행정, 문화의 중심지인 타이베이에는 총독부와 학교, 일본식 신사 등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근대의 광경들이 펼쳐집니다. 일본은 명백히 제국의 입장에서 타이완을 통치하였습니다. 타이완의 원주민이 일본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입니다.

현재 타이완 학계와 사회의 일각에서는 일본의 통치로 인해 타이완에 근대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관점에서 식민의 역사를 바라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타이완의 각기 다른 역사 인식에 관해, 어떤 학자는 대부분은 한국은 5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왕조가 있었으며, 이 왕조의 멸망이 가져온 비극성과 민족의 자존심이 투영되어 있는데 반해, 타이완은 네덜란드와 청나라 등 외래정권 통치를 받았으며, 할양 직전에도 청나라의 속지에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차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 인식은 곧 지금의 정세와 교육 등과도 깊은 연관이 있으므로, 이러한 해석마저도 현재 상황과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함에 따라 타이완에도 광복이 찾아옵니다. 다만, 봄이 왔다고 해서 타이완 사람들이 광복의 상황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에 이어 타이완을 통치하는 정부가 되었으며, 국공내전의 결과로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때 타이완에 들어온 외성인(外省人)과 그들의 정부는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이 때문에 청나라 시기 전후부터 타이완에 넘어와 살고 있던 내성인(內省人)들과 반목하게 됩니다. 1943년 타이완의 남부 도시 까오슝(高雄)에서 발발한 2.28 사건은 그러한 갈등이 폭력으로 분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타이완 사람들이 국민당 정권을 불신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타이완에는 군부독재 혹은 권위주의 통치라 불리는 정치체제가 사회의 반대계층과 대립각이 중요한 정치·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현재 타이완 학계와 여론의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권위주의 통치 시기, 혹은 백색테러의 시기로 규정하면서 국민당의 수장인 장개석과 그의 통치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장개석 동상이 훼손된 사례가 종종 보이는 것은 아마 변화된 사회 분위기와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렇듯 한국과 타이완은 떨어져 있지만 서로 비슷한 역정을 겪어왔습니다. 비록 30년 전 단교 이후 양국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언젠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동보(同步)의 계기를 만들어 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전에 타이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도식적인 해석과 편향적인 관점에만 치우쳐져 않았는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남의 관점을 빌리지 않고, 새롭고 다양한 관점에서 타이완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김봉준 (국립대만대학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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