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일시: 2021년 10월 19일(화) 오전 11:00 ~ 12:00
장소: 줌 온라인
인터뷰이: 최갑수 (연구자의 집 이사장,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진행: 박서현 (연구자의 집 미디어팀,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전임연구원)
한국 학술운동사와 연구자의 집
진행자 안녕하세요 최갑수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취지를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면, ‘사단법인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이하 연집)의 2021년 하계 워크숍에서 장기비전을 논의한 이후 연집 미디어팀이 결성되었습니다. 미디어팀은 연집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알릴 뿐 아니라 연집 회원들이 연집에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으며 연집 활동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소개하는 인터뷰를 뉴스레터에 담아 발신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뉴스레터 첫 호는 2020년 10월 30일 개최된 연집 창립총회 1주년을 기념하여 2021년 10월 30일 발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첫 호에는 연집의 이사장이신 선생님의 인터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최갑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의 삶이나 학문의 궤적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진행자 연집은 실천적 아카데미즘의 정신으로 신자유주의 지식생산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적 지식커먼즈를 구축하고, 연구자들의 복지와 권리 증진을 이루기 위해 창립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연집 초대 이사장을 맡으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최갑수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하 민교협) 활동의 연장선에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에게 민교협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느낀 점들이 민교협의 존재이유를 확인시켜줬습니다만, 특히 중요했던 것은 ‘현실사회주의’ 즉 소련의 해체였습니다. 대안적 전망의 어떤 본보기로서의 현실체제가 있었는데, 그것 자체는 제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변모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현실체제에서 유토피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도 가집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이념을 기존 체제의 틀에서 해방시켜주고 따라서 대안적 전망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대안적 전망이 어떻게 제시될 수 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사실 제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생시몽과 초기 사회주의입니다.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이지요.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로 정리되기 이전의 사회주의는 훨씬 풍요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현실사회주의를 넘어 대안적 전망이 다양해질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저는 그 한 갈래로서 커먼즈에 주목하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대안적 전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의 본질은 어떤 추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ensemble), 총체라고 말하는데 저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의 인간의 본질 자체가 이미 온통 커먼즈(commons)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인데 신자유주의의 맹공 속에서 오히려 커먼즈의 중요성을 깨닫고 재발견하며 확장해나가는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연집이 이러한 계기를 저에게 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커먼즈에 대한 선생님의 문제의식과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민교협 회장을 맡으셨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진단에 입각하여 시국선언을 하시는 등 여러 활동들을 해오셨습니다. 선생님을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변화를 거치면서도 이어져온 한국 학술운동 역사를 대표하는 산 증인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듯한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연집이 한국 학술운동의 역사를 ‘계승’하는 부분과 ‘변주’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최갑수 거의 논문 한 편을 써야 될 질문인데요. (웃음) 학술운동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한국사회의 변화, 근/현대화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50년간 한국사회는 정말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일국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의미를 가집니다. 꽤 위대한 전통 문명을 가졌던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졌고, 식민지로 떨어진 나라가 불과 반세기 만에 제1세계로 진입한 것 ―좋은 의미도 있고 염려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가 제1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을 저의 삶에서 몸소 겪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이것을 잘 설명해낸다면 정말 전지구적 수준의 학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치 근대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유럽 사회과학이 탄생하고 아담스미스·헤겔·맑스·베버 등이 탄생했듯이 저는 한국사회의 경험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술운동과 연결시켜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변화의 하나의 축은 당연히 자본주의화입니다.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화는 이제 제1세계로 진입하는 데까지 농익은 단계에 이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내면세계까지 장악하는 식으로 한국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자본주의화·신자유주의화·사유화·소유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자본주의화가 별로 진행되지 않았던 시대에 유소년기를 살았던 저는 자본주의가 아닌 것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데, 요즘 세대는 자본주의가 아닌 것, 즉 대안적 전망 자체가 부재한 현실, 그것을 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대부분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삶은 안 그런데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지요. 삶은 자본주의가 절대로 다 통합해낼 수 없습니다. 시장이 다 통합해낼 수 없고 국가가 다 장악할 수 없어요. 인간은 그렇게 장악될 수 있는 성질의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 하나의 축은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려 민주화가 진행되고, 민주주의의 민주화까지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협애화된, 편협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마치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착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위한 역사적 조건은 혁명적 폭력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낳은 역사적 배경, 특히 폭력의 문제에 대한, 폭력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또는 저항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전복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적 전망의 부재, 즉 자본주의가 아닌 세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삶에 있어서 폭력이 가지는 창조적 의미에 대한 인식의 약화가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대안적 전망과 창조적 저항이 아니고는 현실을 돌파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의 학술운동에 대해 생각해보면 제가 학술운동을 시작할 때의 기본적 목표는 독자적 학문 재생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용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한국에서 제대로 된 근대 학문이 막 시작되고 있었던 1980년대에 ―그때 저는 30대의 학문 초년생으로서 의기가 있었는데요(웃음)― 우리는 우리 사회, 우리 대학에 독자적인 학문 재생산 기반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목표는 절반이 이루어진 듯 보입니다. 분야로 따져보면 이공계는 예컨대 서울대학교의 경우 신임교수의 절반가량이 국내박사입니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해외 대학에 의존하고 있지요. 그리니 이룩된 것은 애초 목표한 독자적 학문 재생산 기반이 아니라 분과학문체제입니다. 이것은 이제 대학에 확실히 뿌리를 내린 것 같습니다. 근대 대학이 우리나라에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술운동의 의도와 결과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나름의 독자적 학문 재생산 기반을 만들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럽과 미국이 설정해 놓은 근대 대학 즉 분과학문체제를 가져오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큰 변화와 맞물리면서 진보적 학술운동의 정체성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아쉬움입니다. 학술단체협의회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학문적 실천, 변혁적 전망과 분과학문체제의 장점인 학문의 엄밀성, 과학성을 결합시키는 노력이 같이 가야 되는데, 절반의 성취이고 달리 말한다면 절반의 실패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연집이 학술운동에서 변주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동안 망각된 부분, 잃어버린 부분을 변화된 한국의 사회구성 속에서 되살리는 데 조그마하나마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핵심어가 바로 ‘커먼즈’입니다. 맑스주의니 민족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에 비한다면 커먼즈는 거대 담론은 아닙니다. 이것은 생활세계에 주목하고 거대 담론에 묻혀 있던 것을 살려내는 작업이거든요. 저는 커먼즈가 특히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살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공공성은 오직 국가만이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어찌 보면 이것이 현실사회주의의 맹점이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사회 자체 내에 심지어는 인간의 삶 자체 내에 공공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을 커먼즈로서 새롭게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구체적 실천을 일부나마 할 수 있다면 연집이 학술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후배 동지들께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학술운동의 새로운 주안점으로서의 커먼즈
진행자 커먼즈와 공공성의 문제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중에 지금의 젊은 세대의 경험과는 구분되는, 선생님께서 하셨던 자본주의가 아닌 것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부재한 자본주의가 아닌 것에 대한 경험이 대안적 전망의 부재와 연관되는 측면이 있으며, 이는 다시금 커먼즈와도 연관되어 있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하는데요, 이에 대해 좀더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최갑수 맑스가 개인적 소유(personal property)와 사적 소유(private property)를 구분하지 않았습니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가 오더라도 소지품이나 기본적인 주거와 같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있겠지요. 생산수단은 사회화되겠지만요. 그런데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소유의 대상이지만, 그 반대편에서 보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일부분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삶의 토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예컨대 공기·땅·물·불 등, 이런 것들은 사실 대부분 다 공유되는 것들, 커먼즈이지요. 그런데 어느 때인가 인간이 토지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토지가 아마도 가장 먼저 사유화되었을 것이에요. 우리 삶의 근저에 있는 것 중에서요. 지금은 물도 그렇고요. 저는 이것도 참 놀라운데요. 등산을 좋아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이른바 ‘약수’, 그러니까 샘물을 안 마십니다. 그 좋고 맛있는 물을 안 먹어요.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바로 그 물 때문이라는데 말입니다. 제가 1995년에 미국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턴대학교(Univ. of Washington)의 교수, 학생들과 마운트 사이(Mount Si)라는 산에 올랐습니다. 마운트 사이는 화강암으로 된 산인데 그러면 당연히 물맛이 좋아요. 물이 나오는데 아무도 안 마시는 것이에요. 내가 그걸 떠마셨더니 재미있는 것은 올라갈 때는 나만 마셨지만 내려올 때는 그 사람들이 마시더라고요.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 마신 것이지 않을까 해요. 이 말씀을 드린 것은 사실 제가 커먼즈에서 핵심적인 것이 물이라는 즉물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이번에 코로나19로 인해서 더 자본주의적으로 되었어요. 배달 문화라는 것이지요, 커먼즈라는 단어의 원초적 의미는 부엌입니다. 베르사유궁의 큰 주방을 ‘르 그랑 꼬뮌’(Le Grand Commun)이라고 불렀어요. 이것이 커먼즈입니다. 거기에 모여서 수다를 떨며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는 것이 인간관계의 출발이지요. 모일 회(會)자도 밥그릇을 가운데 놓고 모여 있는 형국이거든요. 저는 이런 것을 커먼즈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로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영역조차 지금 배달문화나 플랫폼 등을 통해 사유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플랫폼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유경제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근본적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공유경제는 사실상 이제까지 커먼즈의 영역에 있었던 삶의 공간에 자본이,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사회주의를 공부하다가 혁명을 공부하고 국가에 대해 공부했는데 ―제 공부의 키워드가 사회주의·혁명·국가입니다― 저는 커먼즈가 이 세 개가 포획하지 못하는 삶의 아주 소중한 부분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끌어모아야 하는, 잃어버린 것들을 되살리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해주는, 어떤 새로운 열림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연집은 대안적 지식커먼즈의 구축을 자신의 과제 중 하나로 제시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연집이 연구자 권리선언, 연구자 임대주택, 지식공유 플랫폼 등의 사업들을 실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갑수 이러한 구체적 활동들도 중요하지만 저는 먼저 이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끼리, 요즘 많이 쓰이는 말로, 커머닝(commoning)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인 생시몽주의자들·푸리에주의자들·까베주의자들은 소공동체 실험을 했어요. 심지어 까베주의자들은 미국 아이오와나 서부로 이주해서 일부에서는 30년간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거금을 필요로 하지만 연구자 임대주택 운동 같은 것은 도시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성에 소공동체 실험이라는 형태가 접목될 수 있다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지속성을 가지려면 어떤 형태로든 수익성이 있어야 하지요. 그럼에도 저는 연구자 임대주택을 소공동체 실험 수준까지 밀고나가는 것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 권리선언은 운동의 일종의 정언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운동의 강령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지식공유 플랫폼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커머닝의 근거이자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시할 수 없는 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 문법, 국가 문법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확인시켜주는 핵심적 부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먼즈가 시장이나 국가와 같은 무게·가치·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커먼즈를 키워가는 활동은 그 실천적 의의가 이미 충분한 것이지요. 커먼즈를 우리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우리말로 길들이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진행자 커먼즈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곳은 공동목장이라든지 공동어장이 존재하는 농산어촌이지만 커먼즈를 통해서 대안적 상상을 하는 경우에는 도시커먼즈의 문제를 고민해야 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커머닝을 도시성과 소공동성을 결합시키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데 있어 선생님께서 고민하셨던 부분을 좀더 소개해주시면 좋지 않을까합니다.
최갑수 과거의 도회성의 장소는 장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터가 우리 역사에서 번성했던 것은 조선 후기 임란 이후부터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성의 맹아를 찾으면서 장터를 주목하고 이를 통해 ―미진한 부분이 있음에도―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졌다는 김용섭 선생 등의 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었지요. 지금도 전통장이 대개 인구 500명 정도 되는, 과거 기준으로는 면 소재지 정도의 시골에는 있습니다. 이 장터는 어느 누구의 땅이 아니에요. 그냥 길거리에 5일장, 7일장 이렇게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죠. 이것은 진짜 자유의 공간인 것 같아요. 지금 용어로 말하면 비록 일시적이지만 커먼즈가 풍부하게 발현돼 있던 관계망의 형태가 장터이지 않은가 합니다. 저는 도시에서도 이런 의미의 커먼즈를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이 있지 않을까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획들을 실천하면서 공통적 경험을 이례적으로라도 만들어가며 커먼즈의 영역을 꾸준히 생활세계 속에, 생활공간 속에 늘려가는 것이 연집이 시도해 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보통 자유에 대해 얘기하면 신자유주의적 의미의 자유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자유 개념 자체를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커먼즈 개념이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커먼즈로서의 자유, 커머닝의 자유, 커머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유라는, 자유 개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연구자 권리선언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연집은 연구자 권리선언 초안을 마련한 다음 대학원생 노조,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민교협, 학술단체협의회 등과의 토론회를 거쳐 현재 최종본을 확정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권리선언 전문의 초안을 작성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전문 초안 작성 시 주안점으로 삼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아울러 권리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갑수 제가 초안을 작성한 것은 아니고요. 박철현, 김민환 두 분이 만든 자료를 제가 꽤 손질했습니다. 사실 제가 1791년 프랑스 헌법 전문이 된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 대한 자세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권리선언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단순한 정언명령이 아니라, 근대혁명기에 새로운 국가 및 시민사회의 구성 원리를 제시하는 헌법의 전문 역할을 했습니다. 그 헌법이 근대공법체계의 연원을 이루고, 그러기에 1789년 인권선언의 용어와 이념들은 우리나라 헌법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습니다. 헌법은 새로운 국가의 권력구조를 밝히고 만드는 것인데 그 기본 원리는 인간의 자연권, 요즘 말로는 기본권에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것이 한 부분이고 이를 위해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이 다른 한 부분입니다. 헌법은 이렇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주체는 각기 인간과 시민입니다. 기본권의 주체가 인간이고 권력형성의 주체가 시민이지요. 미국 헌법의 경우에는 상황 때문에 먼저 급하게 권력구조를 만들고 나중에 기본권에 관한 조항이 수정 조항으로 들어가는데요 프랑스인들이 이를 지켜보고 순서를 되돌린 것이지요. 원리를 먼저 밝힌 다음 ―이 원리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 인권선언이지요― 권력구조 형성에 관한 부분을 붙여서 헌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 공법 체계에서는 헌법·법률·행정명령·조례·내규와 같은 식으로 규범의 서열이 정해져 있는데 최상의 심급을 차지하는 것이 선언입니다. 선언은 인간 기본권에 관한 국제 규약으로 발전하고 20세기에 들어오면 국제법의 연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언은 심지어 각국의 국내 문제에도 개입하는 여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성안된 연구자 권리선언과 비교해보면 제가 작업했던 것에는 훨씬 더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언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연구자, 연구라는 용어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발명·과학·기술·예술·학문·학술 이런 용어들은 있습니다만 연구나 연구자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을 하면서 연구자가 아닌 연구의 정의를 1조로 했습니다. 나중에 빠졌지만 거기에 제가 아주 멋있는 말,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구사했어요. (웃음)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행위는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며, 인간 해방의 계기이다”로 시작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최근 노벨상 수상자들이 하나 같이 다 언급하는 단어가 호기심입니다. 사실 호기심이야말로 연구의 출발점이거든요. 저 우주의 별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마법과 같은 것이지요. 제가 초안 작업을 할 때 정언명령과 같은 의미의 원칙적 선언이고 동시에 이것이 헌법에 우선하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헌법에 없는 연구라는 용어를 새롭게 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만 연구라는 키워드를 너무 학문적으로 좁히지 말고, 좀 더 폭넓게 커머닝하는 자세 자체를 일종의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내적 역량을 발현시켜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호기심을 잠재적 역량과 결합시키는 과정으로 연구를 이해하며 그래서 연구 자체도 커먼즈의 핵심적 부분을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국가학의 과제
진행자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연집이 호기심을 가지고 내적 역량을 발현시키나가는 연구를 가로막는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실천을 전개하는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될 듯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프랑스사를 연구해오셨습니다. 지금은 퇴직을 하셨는데요 선생님께서 현재 학문적 과제로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평생 동안 연구해오신 프랑스사가 선생님께 가지는 의미, 나아가 한국 학계와 한국 사회에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갑수 사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모순적 존재라고 생각하듯 저도 모순적 존재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대안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고민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프랑스나 유럽 사회에서 가장 탐났던 것은 국가였습니다. 유럽 사회의 공공성의 담지체로서의 국가 말입니다. 헤겔 법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짓틀리히카잇트(Sittlichkeit) 즉 인륜의 담지체로서의 국가이지요. 물론 유럽의 국가들이 실제로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계급적 성격을 갖고, 국가폭력의 담지자이기도 하고, 제국주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국가가 좀 부러웠어요. 구한말 이후 우리에게 국가가 사실상 부재했던 것 아닙니까? 근대국가 형성의 전범을 보여줬고 또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근대성의 새로운 경로를 보여준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제가 프랑스사를 연구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맑스주의를 형성한 세 요소로 영국의 정치경제학, 독일의 철학 즉 헤겔 변증법,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꼽지요. 사회주의를 만든 나라도 프랑스입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이라는 위대한 인간성의 분출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이 프랑스가 저를 사로잡았던 이유였습니다. 지금 제가 혁명사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이 글이 정리되면 아마도 국가 문제에 천착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의 모순입니다. 대안적 전망의 경로를 바로 추적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탐냈던 유럽의 국가가 어떻게 해서 헤겔이 말하듯 윤리적 담지체 ―이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입니다만― 로까지 끌어올려질 수 있었는가를 추적하는 작업이 아마도 제 마지막 학문적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연집에 제안해서 국가세미나 같은 것을, ―제가 좋아하는 말이 독일어 국가학(Staatswissenschaft)인데요― 국가학 세미나 같은 것을 할 생각입니다. 물론 국가학이 말하지 못했던 것, 말할 수 없었던 것, 보지 않으려고 했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제가 우리 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정치학자로서 국가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했고 그래서 국가의 발자취를 사료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 학문적 작업으로서 3년 정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욕심이겠죠. 너무 나이 들어서 욕심 가지면 안 되는데 … (웃음) 노력하겠습니다.
진행자 나중에 국가학 세미나에 참여하겠습니다. (웃음) 근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내용을 잘 정리해서 선생님의 학문적 고민, 학술운동의 의미, 커먼즈에 대한 사유 등을 공유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자체가 커머닝의 과정일 것 같고요. 인터뷰에 참여해주시고 선생님의 고민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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