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일시 : 2022년 4월 13일(수) 오후 7:00 ~ 8:30
장소 : 줌 온라인
인터뷰이 : 이승원 (연구자의집 운영위원,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전임연구원)
진행 : 박서현 (연구자의집 미디어팀,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연구자의 집과 경의선공유지운동
진행자 : 안녕하세요 이승원 선생님. ‘지식공유 연구자의집’(이하 연집)에서 분기별로 발행하는 뉴스레터 게재를 위한 회원 인터뷰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연집은 “실천적 아카데미즘의 정신으로 신자유주의 지식생산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적 지식 커먼즈를 구축하고, 연구자들의 복지와 권리 증진을 이루기 위해 지난 2019년 1월 26일 창립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연집의 창립에 참여하셨을 뿐 아니라, 창립 이전부터 활동하시면서 연집의 상을 함께 만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먼저 선생님께서 연집에서 활동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좀 오래 전 얘기인데요, 아마도 거의 7년이 지난 얘기인 것 같습니다. 제가 2008년부터 2011년 가을까지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습니다. 현 서울시 교육감이신 조희연 선생님께서 당시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로서 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민주주의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면서 저는 다른 연구자들 및 성공회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구자협동조합 ‘데모스’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데모스의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급진민주주의와 커먼즈였습니다.
당시 조희연 선생님께서는 민교협 상임의장으로서 민교협 활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민교협의 경우 주로 정규직 교수들의 학적 권위와 활동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활동해왔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중후반부터 정규직 교수의 확대재생산이 사실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운데 민교협 자체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물론 이는 비정규연구자들이 그만큼 확산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비정규연구자들은 생활기반, 생존기반이 미비한 상태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특히 비정규연구자들의 연구공간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희연 선생님이 은퇴교수들이 사비로 개인연구실을 마련하는 경우가 있는데, 개별적으로 연구실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공동공간을 만들어서 공간의 일부를 비정규연구자들, 독립연구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업을 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당시의 연집 구상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저와 현재 연집에서 활동하는 박배균 선생님, 엄은희 선생님 등이 몇 번 회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조희연 선생님이 서울시 교육감이 되었고 저도 민주주의연구소를 떠나게 되는 등 연집 구상을 실현하려했던 주체들이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되어 논의가 중단됐습니다.
한동안 중단됐던 논의가 박배균 선생님이 민교협 상임의장이 된 이후 연집 구상과 철학을 복원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지셨고 이에 몇몇 연구자들이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민교협 차원에서 논의했습니다. 당시 저는 민교협 정식회원은 아니었지만 오래전에 연집 구상을 함께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같이 활동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위와 같은 생각으로 연집을 추진하려했습니다. 물론 좀더 새롭게 하려했던 것은 공간을 공유하는 정도를 넘어 한층 더 심화된 비정규연구자 문제에 대해 적극적 개입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법을 스스로 찾는다는 취지에서 연집이 공간뿐만 아니라 불안정연구자를 위한 상호부조 복지체계를 자체적으로 만드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을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이어지다 이후 경의선공유지운동과 결합하면서 현재의 연집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진행자 : 공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제의식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측면 등에 대한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특히 연집이 경유선공유지운동과 결합하면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실제로 연집 활동이 경의선공유지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연집의 일원으로서 경의선공유지운동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경의선공유지운동에 대해 생소하신 분도 있을 것 같아서 이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 운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경의선공유지운동과 연집의 관계가 무엇인지 문의드립니다.
이승원 : 경의선공유지운동에 대해 제가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2021년 출간된 『커먼즈의 도전: 경의선공유지운동의 탄생, 전환, 상상』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경의선공유지운동에서 이루어진 여러 활동의 의미를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경의선공유지운동에 대한 논문들이 여러 편 나와서 이를 참조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경의선공유지운동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공공성’에 대해 혹은 ‘공유재’에 대해 다시 사고하게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공공성, 공유재가 기본적으로 시민의 연합체로서의 국가가 시민을 위해 보장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사유화해서도 안 되고 국가 또한 특정한 목적으로 이를 전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시민이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공유지 혹은 공유재는 특정한 시기에 이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의 삶의 보장을 위해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공공성 또한 사유화와 국가의 전용에 맞서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책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의선공유지운동은 공공성과 공유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경의선공유지운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단순히 이론적으로 혹은 참여관찰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 아니라 왜 공유지인가, 공유지는 어떻게 관리돼야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경의선공유지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직접 제기하고, 공유지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민주적 활동을 책임 있게 실천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점유운동들이 있었지만 이 운동들은 커먼즈라든가 공유재라는 관점에서 점유의 문제에 접근했다기보다는 특정한 정체성 집단을 위한 운동에 머물렀습니다. 이와 달리, 경의선공유지운동은 여기에 참여한 주체들의 운동인 동시에, 이 주체들이 이 사회에 화두를 던지고 또 사회가 경의선공유지운동을 통해서 또 다른 공유지 혹은 또 다른 공공성에 대해 조금 더 급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집과 경의선공유지운동의 관계에 대해서는 연집이 왜 경의선공유지운동에 결합하게 되었는가가 먼저 설명돼야 할 것 같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 사회운동이 어려움과 혼란을 겪으면서 변화해가는 과정 속에서 저는 사회운동과 학술운동이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발전적 과정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 모양새로 볼 수도 있을텐데요, 저는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봅니다. 1980~90년대에는 맑스주의 등의 특정 이론과 그 이론을 중심에 둔 운동이 정당성을 가지고서 사회운동,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론 자체의 현실적 한계 혹은 운동 안에 존재했던 변화의 욕구 속에 이론과 현실이 혹은 이론과 운동이 충돌하거나 이론과 운동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운동이 사회에 개입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기존 이론이 재구실을 하지 못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연구자의 잘못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이러면서 운동이 둔화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운동은 사회운동대로 학술운동과 거리를 두며 자기 영역을 이론화하거나 정책화하는 흐름이 있었고, 학술연구 진영 또한 현장과 다소 괴리된 상황 속에서 훈고학적 연구를 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집도 초반에는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연집 활동이 연구자들만의 어떤 이익조합적 운동이 돼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연집이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야한다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연구자 운동이 현장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고민과 함께, 나아가 연구자의 상호부조라든가 연구활동을 위한 안정적 기반을 스스로 만드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연구자를 위한 커먼즈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실제 현장을 점유하는 운동으로서의 커먼즈운동,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자들의 기반을 마련하는 운동으로서의 커먼즈운동에 ‘커먼즈’라는 교집합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연집이 경의선공유지운동이라는 현장에 개입해서 연구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또 우리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며 연집의 정체성도 만들어가자고 논의했습니다. 이것이 연집이 경의선공유지운동이라는 현장과 결합한 이유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아직 큰 변화를 주지는 못했지만, 학술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 있어서도 작은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낼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키먼즈 운동의 의미와 커먼즈 운동으로서의 학술운동
진행자 : 말씀을 듣고서 경의선공유지운동에의 결합이 연집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경의선공유지운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도시커먼즈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운동의 화두로서 커먼즈가 등장하게 된 것은 2010년대 이후이지 않을까합니다. 선생님께서 운동의 화두로서 커먼즈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하시는지, 커먼즈 개념이 열어낸 사회운동의 어떤 새로운 지평과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경의선공유지운동은 투기적인 도시개발의 첨예한 현장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서울의 특정 지역에서 이루어진 운동인데요. 도시문제와 관련해서 커먼즈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우리 사회에 커먼즈라는 화두가 제기된 것은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의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가 번역·소개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커먼즈를 국가와 시장이 어떻게 좀더 제대로 관리할 것인가를 중심에 둔 접근법이 아닌가합니다. 이와 달리, 경의선공유지운동에서 커먼즈 개념을 사용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도시커먼즈 운동이 일종의 헤테로토피아 운동이기 때문이지 않을까합니다.
물론 도시커먼즈 운동이 거대담론으로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핵심적 대안 담론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며 이러한 점에서 발전이 이루어져야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도시커먼즈 운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질서·패턴·생애주기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 담론이지 않은가 합니다. 그것은 커먼즈가 공적 영역, 사적 영역이 아닌 제3의 영역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신자유주의에, 자본주의의에, 근대적 법과 질서에 끼워 맞춰져 있는 개인의 정체성과 권리가 마치 상식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법과 제도에 따라서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도시커먼즈 운동은 은폐되어 있거나 억압되어 있는, 혹은 우리가 잘 모르는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 성적·문화적 소수자들, 장애인들, 노숙자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질서 하에 관리되고 통제되며 권력이 부여하는 질서 안에서 움직이면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제한적인 동시에 자유의 또 다른 영역을 은폐하고 있었는가를 이미 경험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법과 질서가 규정하는 담론과 권리 영역이 우리를 점점 더 위태롭고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도 경험했습니다. 도시커먼즈 운동은 묻혀져 있던 권리 담론을 복원하고, 나아가서 권리 담론의 물적 토대가 되는 물적 기반을 만들어내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커먼즈 운동은 새로운 권리 담론이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운동입니다. 권리 담론의 기반이 되는 장소와 공간을 만드는 운동, 관계성을 만드는 운동입니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법, 질서와 때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충돌이 갈등을 유발시키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드렸듯이, 기존의 법과 질서 그리고 일상성에 대해서, 기존의 권리 담론에 대해서 급진적으로 성찰하게 만들고, 그래서 은폐되고 억제됐던 이러한 영역들을 끄집어내어 소외된 자들,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제공해주며,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반을 그들 스스로 만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좀더 말씀드리면 2000년대 이후 우리 운동의 역사는 1980-1990년대 거대 담론에 기반을 둔 운동의 역사를 해체해 가는 역사였습니다. 해체해 간 것이었는지 해체 당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평가를 해야겠지만 2000년대 이후는 기존의 거대 담론이 사라져가던 시기였고, 기존의 운동 자산이 소실돼가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 상황 속에서 기존의 많은 운동 세력들이 새로운 정치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제도 정치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민주화운동 세력 혹은 사회운동 세력이 제도 정치공간에 들어갔지만, 초심과 달리 사회운동이 확장되기보다는 오히려 제도 정치공간이 사회운동을 흡수해 가는 현상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드린 것처럼 사회운동과 학술운동이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했고, 나아가 제도 정치권으로 사회운동이 들어가는 흐름이 있으면서 예컨대 노동운동계나 시민사회운동계의 인사들이 국회의원이 된다거나 관료가 되는, 하지만 운동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운동을 제도화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사회운동 세력도 힘과 기반이 약해지다 보니 여러 자구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사회적경제와 사회혁신 영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저는 이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보는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적경제, 사회혁신이 한국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토착화되면서 기존 운동을 더 풍부하게 하거나 운동 자산을 만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운동에 참여한 세력들이 점차 관료화되고 제도화되면서 남아 있던 사회운동의 자산 혹은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부정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의 위기, 담론의 위기가 말해졌습니다.
저는 커먼즈 운동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대안담론이자 대안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는 과거 운동과 이 운동의 위기를 극복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운동의 자산을 운동 주체들이 스스로 생산해 나간다는 점에서 운동의 방향, 운동의 의미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는 민관협치 등을 통해 어떻게 하면 공공영역의 공적 자산을 운동영역으로 투입시키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공공이, 공적 권력이 시민사회 운동과 대치할 때, 갈등할 때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자산은 무엇인가, 자산의 부재로 우리는 좌초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커먼즈 운동은 시민사회 운동이 이제는 자기 스스로 좀더 든든한 운동의 자산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산에는 물론 재정적인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커먼즈운동이 새로운 권리들을 확장해가고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무형의 기반을 만들어 간다는,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새로운 운동전략을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커먼즈 운동이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운동이 제도화되고 관료화된다는 것은 운동이 체재에 내화되는 흐름, 시장질서에 편입되는 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더 넓게는 자본주의의 가장 본질적 문제인 소유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대단히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소유권을 폐지하자라든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가자라는 어떤 급진적 외침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리 담론이 사적 소유권이라는 점입니다. 기업의 사적 소유권이든 개인의 사적 소유권이든, 이것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가의 역할이지요. 이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인정하는 제도가 만들어내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부동산 문제, 임대 문제, 근로소득 문제, 소득 불평등 문제이지요. 공유지를 공적 사유화하는 흐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흐름들에서는 시민들을 위해 국가가 공유지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시민들을 배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이 소유하는 볼펜이나 개인의 지갑에 있는 돈이나 개인이 소유하는 부동산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권이 배타적으로 강조됐을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고, 나아가 사적 소유권을 중심에 두는 혹은 사적 소유권으로 수렴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가치가 과연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보장돼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사회적 가치가 사적 소유권이라는 배타적 권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현실에서 저는 우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가치가 그것을 함께 만든 시민들에 의해 좀더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게 항유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를 통해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물음을 커먼즈라는 화두가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권에 대해 좀더 본질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성찰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커먼즈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진행자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커먼즈가 사적 소유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일견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영역을 열어젖히게 한다는 것, 커먼즈가 운동 주체가 운동의 자산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측면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잘 들었습니다. 이러한 진단의 전제와 같은 것으로서 주체의 문제에 대해 문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운동의 주체가 운동의 자산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운영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운동을 이어가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결국 커먼즈가 운동 주체를 수동적이고 왜소한 주체가 아니라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량을 가진 주체로서 사고하는 것을 전제한다거나 혹은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저도 그 부분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관련해서든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든 주체의 문제를 생각할 때 주의 깊게 고민해야 될 것이 근대적 주체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한다는 점입니다. 근대적 주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 수 있습니다. 합리적 선택이 가능한 소위 정상인을 주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와도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저는 모두가 주체라고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나와 같은 사람도 주체이지만은 나와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도 주체라는 것이지요. 어린이나 장애인, 장애인 중에서도 발달장애인, 우리말이 서툰 이민자, 사회적 범죄자, 소통할 수 있는 언어와 지적 체계가 다르며, 육체적 움직임이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착각은 나와 비슷한 의식 수준에서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적어도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협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체로 인정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커먼즈 운동과 연결시킬 수도 있고 연구자 운동과 연결시킬 수도 있을텐데요, 나 또한 위와 같은 합리적 주체라는 어찌보면 굉장히 건방진 생각을 버려야지만 우리가 새로운 주체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질적이고 불편하고 적대적이어서 굳이 왜 소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또 일 대 일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야말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합의에 이를 것인가를, 공공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이고 어떻게 이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부터 주체에 대해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만 다양한 의사소통 수단도 고민할 필요가 있고 차별이 아닌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며, 나아가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무엇인지를 논의하면서 운동과 연구를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 좀더 본질적 접근을 해야 된다고, 우리가 빠져 있는 주체에 대한 기존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초점을 좁혀서 연집과 커먼즈 운동에 대해 문의드리고자 합니다. 연집의 영문명이 Scholars’ Commons이지요. 커먼즈가 포함되어 있는데요. 연집의 활동을 201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고 있는 한국의 학술운동이라고 한다면, 학술운동으로서의 연집의 활동이 어떤 점에서 커먼즈 운동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학술운동에는 여러 측면이 있는데요, 저는 학술운동을 연구자의 앙가주망(engagement), 적극적 참여와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가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고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이 사회의 자유와 평등의 확장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하는 것이자, 그러한 개입을 위한 연구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학술적 표현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연구자들의 연구기반이 취약하다면 이러한 앙가주망 혹은 지식인들의 현실 참여나 개입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좋은 연구활동을 꿈꿔왔지만 당장 먹고살기 힘들고 또 어디 취직하기 위해서, 어디 자리잡기 위해서 원치 않는 글을 쓰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현실에 개입함과 동시에 현실에 개입을 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기반을 만드는 것, 이 둘 다를 저는 학술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집 활동이 어떤 측면에서 커먼즈 운동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첫째 저는 연집 활동을 하면서 저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이 무의식과 일상의 패턴, 삶의 모습에서 우리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힘에 많이 길들여져 있구나, 제가 급진 민주주의를 외치고, 커먼즈를 외친다고 하지만 저 또한 사적 공간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힘에 길들여져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고 이렇게 쓴 글이 수용되는 과정을 통해 알려진 제 정체성과 다르게 제가 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소유적 개인주의 방식으로 제 문제를 해결하려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굉장히 외롭고 좌절감도 있고, 그래서 현실과 더 타협하려는 감정, 생각이 들고 또 실제로 그러한 결정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연집 활동을 하면서 저는 이 활동이 우리 연구자 자신에 배인, 신자유주의에 훈육된 기름때를 제거하는 중요한 운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연집 활동이 우리 연구자의 존엄성을 살리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저는 연집 활동이 연구자의 커먼즈 기반을 만드는 것이고, 또 연구자가 만든 커먼즈 기반이 이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확장하기 위한 기반으로 사용되도록 함으로써 연집 활동이 커먼즈 운동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생활이 이미 안정된 정규직 교수들이 자신들의 사비를 털거나 시간을 할애해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운동 방식에서 벗어나서, 아울러 벗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연구자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자긍심을 키우기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이지요. 밖에서 봤을 때에는 연구자들 혹은 석박사를 한 사람들을 특권층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래서 연집 활동이 결국 좀 잘난 지식인끼리 또 자기 밥그릇 챙기려하는 운동이 아닌가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오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연구자들이 적극적인 사회적 참여, 개입을 하는 동시에 이를 위하여 연구자 스스로 우리 자신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또 연구자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연집 활동이 연구자의 커먼즈 운동이자 나아가 우리 모두의 커먼즈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급진 민주주의와 커먼즈의 관계
진행자 : 연집 활동을 통해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이러한 기반이 연구자로서의 어떤 새로운 감성을 갖는 자기 변화의 토대와 같은 것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지적 여정과 관련된 질문들이 될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과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를 번역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국 에섹스 대학(University of Essex)에 유학하시면서 라클라우를 지도교수로 하여 정치철학, 민주주의를 연구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문제가 선생님의 연구와 실천의 중요한 화두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적으로 라클라우와 무페가 제기하는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가 무엇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승원 : 이 질문이 제게는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요. 라클라우, 무페가 제기하는 급진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가 여러 차례 받았는데 먼저 저는 라클라우와 무페가 제기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제 생각을 전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두 사람의 모든 이론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읽을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고, 또 라클라우, 무페가 제기하는 급진 민주주의를 제가 권위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급진 민주주의를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본질로 규정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기반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리고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준거들조차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성찰해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민주주의 영역이 확장되기도 하고 또 특정한 헤게모니 질서 속에 구축되어 있는 민주주의 영역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질서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의 논리’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특정한 질서에 대해 비판하고 그 본질을 뒤흔드는 ‘전복의 논리’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만약 구성의 논리만을 강조하여 특정한 질서의 준거틀만을 계속해서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쪽으로 민주주의가 연구가 될 경우, 그 질서를 영속화시키고 절대화키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즉 전체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만약 전복의 논리만을 강조하여 기존의 사회적 계약이나 합의, 사람들 사이의 윤리적 틀에 대한 문제제기와 전복만이 강조될 경우, 사람들이 예측가능한 안정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구성의 논리와 전복의 논리 양자를 오가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성의 논리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계보학이나 그 에피스테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며 이로부터 지식이라고 생각되는, 권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민주주의에 소속되지 못한 주체들, 소속되지 않은 권리들, 소속되지 않은 영역들이 왜 그러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경계들을 재구성하는 시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전복의 논리가 가지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전복의 논리가 지나치게 강조가 될 경우에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 다양한 정체성이 특정한 전복의 논리를 위해 동원되어 어떤 집합적 정체성에, 집합주의의 흐름 속에 은폐되거나 사장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전복의 논리를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 재구성도 중요하지만 전복의 논리나 구성의 논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끊임없이 진동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급진 민주주의는 숙의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 같은 민주주의의 특정한 제도적 형태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주체가 탄생했는가 그리고 어떤 주체가 배제되었는가 등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가면서 민주주의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제는 특정 질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정 민주주의 담론이 구축하고 있는 질서 혹은 정치 전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결과, 헤게모니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해게모니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제 윤석열 정부가 탄생할텐데요, 이 정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새로운 정책을 추구할 것입니다. 이 경우 기존의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가 동일하게 공유하는 민주주의의 면면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윤석열 정부가 재구성하려는 민주주의의 경계나 권리 담론의 영역이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혹은 급진적으로 성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대안적 정치 전략이나 운동 방향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행자 : 인터뷰 중에 성공회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과 함께 만든 연구자협동조합 데모스의 문제의식이 급진 민주주의와 커먼즈였다고 말씀해주셨던 것이 기억나는데요, 급진 민주주의와 커먼즈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양자의 접합이라든지 혹은 민주주의 확장에 커먼즈가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저는 커먼즈 담론 혹은 도시 커먼즈 담론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운동이나 실천들이 민주주의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라고 하면 보통 국가 차원에서 생각하여 대의제와 정당정치를 떠올립니다. 커먼즈는 이를 넘어 정치영역을 사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지 않나 합니다. 공동자산을 사용자들이 함께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커먼즈에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커먼즈의 운영 원리가 반드시 직접 민주주의여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영역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가지는 가장 큰 한계 중 하나는 정당정치, 대의제를 정치의 모든 것으로 사고한다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운동으로, 저항으로, 정당정치와 대의제가 해결해야 될 과제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의제나 정당정치라는 것은 엄청나게 넓은 정치영역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문제는 정당주의자, 대의제주의자들이 헤게모니적으로 정치담론을 독점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선거, 투표, 지방자치 등이 우리를 흡수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정치적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예를 들어 2016년에 있었던 촛불집회, 광장정치가 정치영역을 엄청나게 넓혔습니다. 그런데, 탄핵국면, 대선국면에 와서 일순간 다시 대의제 정치로 휩쓸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정치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넓었는데 헤게모니적으로 이들이 제도정치에로 다시 흡수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사고가 처음부터 정당, 의회, 대의제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광장정치를 경험했던 것이 아닌가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한된 정치를 넘어선 경험을 해왔다면 당시의 광장정치는 오히려 또 다른 정치적 경험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정치적 실험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커먼즈가 기존 민주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대의제와 정당정치에 갇혀 있었던 정치영역을 확장해가는 동기부여를 하는 동시에 큰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커먼즈를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스스로 참여할 수 있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커먼즈 운동이 개방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논의했듯 주체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주체성만을 허락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질적이기 때문에 갈등할 수 있는 주체들도 커먼즈를 사용하고 또 이들과 합의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커먼즈를 통해서 실현되는 정치적 경험은 말씀드렸듯이 주체에 대해, 다양성과 차이에 대해 새롭게 경험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정치를 상상하며, 이러한 상상을 실현하기 위한 실험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커먼즈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 커먼즈에 대한 급진적이고 발본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더 정치적인 이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급진 민주주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영역을, 그것의 기존 경계를 재구성하는 측면들을 가지는데, 커먼즈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영역을 의회나 정당에로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을 다르게 생각하게 만드는 측면이, 그래서 우리 삶 속에서 정치적인 것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커먼즈 운동, 커먼즈 논의가 나아가야 될 어떤 지점과 관련하여 정치적인 것의 문제가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이것이 급진 민주주의와 커먼즈의 관계에 있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좋을까요? 커먼즈 개념이 가지는 어떤 적극적인 힘 같은 것은 커먼즈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측면이라고요.
이승원 : 감사합니다. (웃음)

평등으로서의 사회혁신, 불평등을 극복하는 커먼즈 운동
진행자 : 이런 측면에 주목하는 커먼즈 연구, 즉 정치적인 것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커먼즈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웃음) 계속해서 질문을 드리면 선생님께서는 연집에서 활동하시면서 동시에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의 전임연구원으로 활동하시는데요, 그리고 그 이전에는 서울사회혁신리서치랩에서 활동하셨고요. 여기서 활동하시면서 사회전환, 도시전환의 문제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고민하고 모색해 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사회혁신리서치랩에서의 활동과 선생님의 현재 연구 및 연집 활동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보다 더 일반적 질문으로서 학술적 연구와 사회적 실천의 관계를 선생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비정규 불안정 연구노동자였기 때문에 자주 이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약이 끝나면 다른 데로 옮겨야 되었고요. 힘들었지만 제가 인복이 많아서 1년 이상씩 쉬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몇 개월 지나면 또 새로운 일이 생겨서 그쪽에서 새로운 운동이나 연구 활동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14년 서울시 사회적경제 지원센터에서 사회적경제 관련 국제협력 일을 했습니다. 그때는 사회적경제에 대해 잘 몰랐는데 다만 제가 이전에 국제협력과 관련한 작은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서울이나 한국의 사회적경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경제에 대해 배웠습니다. 유엔이나 유럽에서는 사회적경제를 사회연대경제(Social Solidarity Economy)라고 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경제의 현장활동과 해외 사회연대경제 운동의 역사 등을 배우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또 많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연구하던 급진 민주주의의 새로운 현장, 새로운 주체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016년에 서울시 사회혁신 리서치랩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 속에서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통적인 사회운동 영역뿐만 아니라 정말 굉장히 많은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층위와 영역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있었고 또 어떻게 서로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공생공락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고민이 굉장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러 운동이 있으며,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충돌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실천이 전통적인 사회운동 영역 이외에도 굉장히 많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한 가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대부분 불평등과 차별,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기후위기를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굉장히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가 갈등 관계에 있는 듯한 경우도 있었지만 기후위기와 사회적 양극화, 차별, 불평등에 대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이 ‘자유로서의 발전’(development as freedom)을 얘기했는데, 위의 사실을 확인하고서 저는 ‘평등으로서의 사회혁신’을 사회혁신의 화두로 제안했습니다. 불평등을 이겨내는 사회혁신을 말이지요.
단순히 재기발랄하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새로운 창업을 하는 것 등이 사회혁신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사회혁신이 불평등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참신한 스타트업을 만들었더라도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을 양산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또 하나의 유니콘 기업이 생겨나서 다른 기업에는 하도급이나 맡기는 식의 흐름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사회혁신이라고, 사회적경제나 사회연대경제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저와 우리 연구팀은 불평등을 화두로 삼고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과정이 없다면 그것은 사회혁신이 아니라고, 사회혁신은 불평등의 해결에 복무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새롭게 알게 된 수많은 주체들이 사회혁신이나 사회적경제 영역에 있다보니 대부분 자신의 자산 기반을 만드는 운동을 했고, 이를 위해 정부 정책과 제도가 변화되기를 원하며 때로는 민관협치도 추구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자산을 만들고 자산을 향유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주체들이 커먼즈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 수많은 사람들이 커먼즈 운동을 다양한 수준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배우면서 이후 평등으로서의 사회혁신, 불평등을 극복하며 새로운 기반을 만드는 활동으로서의 커먼즈 운동을 고민하며 경의선공유지운동에 결합하여 본격적으로 커먼즈라는 화두를 제기하게 됐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연집 활동에 참여하게 됐고, 마침 커먼즈에 다들 관심이 있어서 그러면 우리가 연집을 연구자의 커먼즈 운동으로 구체화시키자고 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저는 급진 민주주의와 사회혁신에 대한 연구, 도시전환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연집 활동을 연결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학술적 연구와 사회적 실천의 관계에 대해 저는 말씀드렸지만, 지식인들, 연구자들이 더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 참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사회적 개입과 참여를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의 다양한 권리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의 사회적 개입도 학술적 연구와 사회적 실천의 관계이고 또 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연구자의 기반을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한 연구와 실천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자 사회주택과 연구자 지식공유 플랫폼, 연구자로서의 자긍심
진행자 : 말씀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연집에서 선생님께서 기획하고 실천해온 여러 활동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연집에서 연구자 사회주택, 연구자 지식공유 플랫폼 등의 구상들이 있었고 선생님께서 이런 구상들을 구체화하는 작업 등을 해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러한 구상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선생님께서 이러한 구상들을 모색하셨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사실 제 전문영역은 아닌데요, 먼저 연구자 사회주택을 고민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에 저희가 연구자 수요조사를 했는데 독립연구자들 혹은 불안정연구자들의 경우 주거문제가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연집이 주거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지만 연구자 사회주택을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선공약처럼 100만호를 짓겠다, 200만호를 짓겠다고는 못하지만, 적어도 연구자 사회주택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정책적 화두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혜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이 사실 가까이서 보면 정말로 불안정하고 어려운 사람들이지만 일반인들에는 그래도 저들은 좀더 권력과 가깝지 않을까, 권력층에도 아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라고 보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자 사회주택을 하는 것을 특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어떤 오해를 진지하게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 사회주택이 지역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까를 고민하여 연구자를 위한 사회주택인 동시에 지역공동체를 위한 연구자 모임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자를 위한 주택인 동시에, 이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공유하고 또 연구자로서 우리가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이와 같이 연구자와 지역주민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여러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책 결정자들이 대규모 아파트 중심의 민간 분양 정책을 쓰다 보니 연구자 사회주택이 진입하기 굉장히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요새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자 사회주택의 모색과 같은 맥락에서 연구자 권리를 좀더 확장하기 위해 연구자 권리선언을 했으며 향후에는 연구자 복지법도 만들고자 합니다.
저는 연구자 지식공유 플랫폼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연구자료이지요, 그런데, 연구자 동료들이 함께 생산하는 연구물을, 심지어는 제가 생산하는 연구물을 때로는 유료로 봐야 된다거나 대학에 소속되어 있거나 알 만한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만 접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연구물이 연구자와는 무관하게 상업화되고 유료화되는 경로들이 있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식공유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식공유 플랫폼은 연구자가 생산한 연구물을 연구자들이 공유하고 나아가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시민 연구자들 역시 이를 항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연집 운동의 의미 중 하나가 연구자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며, 연구활동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 연구자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지식공유 플랫폼 운동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연구물에 대해 평가절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적 소유권이나 라이선스 같은 문제를 떠나서 우리 스스로가 땀 흘려 만든 연구물인데 이것을 학회 홈페이지 하나 만들어주네 어쩌네 하면서, 연구자의 자존감의 기반인 연구물을 우리 스스로 포기하며 살았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연구물을 비싸게 유료화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을 진정 의미 있게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 몇 백만 원에 학회의 연구물을 통째로 파는, 우리의 자존감을 우리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이제 중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연구물에 대해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서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자고, 이럴 때 우리가 연구자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외의 의미 중 하나가 우리가 생산한 생산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멀어지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연구물로부터 우리 자신을 소외시켰던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를 되찾아 소외를 극복해 나간다는 측면에서도 저는 연구자 지식공유 플랫폼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학회 연합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지식공유도 하고 또 연구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도 모색하는 운동이라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합니다.
진행자 : 생산물로부터 우리 자신이 멀어지는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산물에 대한 ‘소유’를 회복하는 대신 우리가 생산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공동으로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연집에서는 현재 많은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강좌 활동도 있고 말씀하신 연구자 사회주택, 연구자 권리선언, 연구자 지식공유 플랫폼 등의 활동이 있는데요. 연집이 향후 좀더 초점을 맞춰서 실천해야 하는 활동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일단 저는 연구자가 맡아야 될 어떤 사회적 책무가 있으며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연구자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자존감을 살리는 것이 또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집에서 여러 실험적 사업을 진행할 텐데요. 그중의 하나로 불안정한 비정규연구자들, 독립연구자들의 자존감을 되살리는 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불안정 연구자들이 가지는 불안감 중 하나가 소속감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지금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대학이나 강의하는 기관, 일하는 곳이 자신의 직장이라고, 자신의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은 여기서 비정규직이고 마이너이기 때문에 그냥그냥 이러이런 수준으로 지내야지라는 식으로 다소 의기소침하게 지내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굉장히 많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얼마 전, 연집에서 비정규 연구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은퇴식이라고 얘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정규직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은퇴식을 하고 제일의 삶을 마감하고 제이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갖지요. 저는 이러한 기념식이 개인의 삶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비정규연구자들이 이미 그것을 포기한 지 오래 됐습니다. 자신이 언제 은퇴하는지 확실치 않고 기념식도 없는, 은퇴를 하더라도 축하받는 것이 굉장히 어색한,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저는 비정규연구자들, 불안정연구자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구자로서의 삶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책무를 다하는 데 있어서도 주저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연집에서는 이러한 불안정연구자들의 자존감과 명예를 살리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이들이 또 사회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정연구자들의 명예로운 퇴임식이나 이들의 소중한 강연 영상 제작 등을 하고 싶습니다. 모두에게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연집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연집이 연구실천의 중심에 있는 이상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러한 우리를 축하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겠구나라는 작은 희망을 전달해 주는 사업이 저는 좋다고 생각하고 이런 사업들을 하고 싶습니다.
진행자 : 이제 마지막 질문이 될 듯한데요, 선생님께서 연구자로서 향후 연구의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이승원 : 저 개인적으로 현재 공부하고 있는 주제는 급진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그리고 도시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도시의 삶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실천이 필요한지, 더 나아가서는 투기적이고 소비적인 도시에서 공생공락할 수 있는 도시적 삶으로의 전환을 위하여 어떠한 감정적 변화와 감동 그리고 정치적·윤리적 힘이 필요한지 등 입니다.
진행자 : 벌써 1시간 반이 지났는데요. 여러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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