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2일 금오도 산행기 (손미아 강원대 의과대학 교수)

활동소식

 

금오도에서 여수 만성리 학살지까지

강원대학교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손미아

 

1. 금오도 여정

 

연구자의 집에서 2024년 6월 1일부터 2일까지 금오도 산행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여수엑스포역으로 가서 여수 돌산 신기항으로 간 후, 신기항에서 배를 타고 금오도 여천항 (백야도)에 도착한 후 항구미항으로 가서 금오도 제1길을 등반 후 두포(초포)에 도착하여 남면을 둘러보고 여천 여객선터미널 근처에서 숙박했다. 그 다음날 안도 둘레길을 둘러봤고, 여천여객터미널에서 여수 돌산 신기 여객터미널로 가서 여수 만성리 학살지(The place of Manseongri Massacre)를 답사하고 오후 4시경 여수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2. 금오도 제1길 등반을 하다

 

2024년 6월 1일 오전 7시 10분에 서울 용산역을 출발하여 9시경 여수 엑스포에 도착하여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했다. 여수엑스포역에서 여수 돌산 신기항으로 간 후 12시에 금오도 여천항행 배에 올라 12시경에 약 20분 정도 배를 타고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했다. 금오도 산행 참가자는 최갑수, 이무성, 박상환, 박철현, 김명연, 손미아였다.

여수에서 금오도로 가는 방법에는 3가지 노선, 즉 여수항에서 출발하여 금오도의 여천항, 유송, 우학, 송고, 함구미로 운항하는 노선, 돌산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하는 노선(하루 7회), 백야도에서 출발하여 금오도 직포항, 함구미로 운항하는 노선이 있다고 한다.

금오도 여천항에서 금오도 제1길의 출발지인 항구미항에 도착하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오도 섬에서의 점심에는 갓김치, 방풍나물 장아찌, 양대 구이, 도라지, 새우장, 멸치, 오징어젓갈, 나물 등 섬에서 나는 것들이 좋았고 금오도 방풍 막걸리도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금오도 매봉산 중에서도 제1길을 올랐는데, 신선대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비렁길 1길이라고 불리는 이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인데도 길바닥에도 밟히는 흙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여 내딛는 발걸음이 한결 편안했다.

금오도 제1길을 오르는 길은 오롯이 난 오솔길을 걷는 것 같았다. 사람 한 명 정도 지나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매우 곧게 나 있었고, 길바닥도 평평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길이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오솔길 양옆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나 잎이 두꺼운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길을 따라 오른쪽엔 바다가 계속 보였다. 등산로는 해안가를 따라 둘러서 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을 둘러서 가는 동안 계속 오른쪽에 바다가 보이면서 올라가는 모양으로 형성되었다. 마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나선형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올라가는 길이 멋있었다. 길 옆에는 대나무 숲, 동백나무, 사철나무 등으로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서 있어 거의 햇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길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마치 구도자처럼 한 줄로 오솔길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섬 군데군데 돌로 축대를 높이 쌓아놓은 곳이 많았는데 이런 곳이 집터라고 한다. 집터에는 사람들이 심어놓았을 법한 나무들,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돌나물, 칡넝쿨 등이 있었다.

한참을 가니 멋진 절벽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에 이것이 신선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도면을 보니 미역 널방이었다. 미역 널방 아래 절벽이 아름다웠다. 미역 널방을 지나는 길에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비렁길 쉼터라는 작은 초막이 있었고 우리는 잠시 들러 쉬어가기로 했다. 노부부가 이 초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거의 없어서 우리가 방문한 게 다행인 것 같았다. 이 초막에서 방풍 도토리묵, 방풍 막걸리, 방풍나물, 손으로 직접 만든 식혜 등을 맛있게 먹었다. 나물 하나에도 뭐라 할 양념도 없이 맛깔스럽게 만들어내는 남도 사람들의 음식솜씨는 일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섬에서 부는 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한 후에 계속 걷기 시작했다. 송광사 절터를 지나 신선대로 가는 동안 섬의 숲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꽃들과 처음 보는 꽃들이 있었고, 처음 보는 나무들도 많았다.

이 섬에는 한때 24,000명이 살았고, 지금은 약 1,70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금오도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집터들이 많았고, 그 집터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은 돌로 세운 축대들, 돌로 만든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장치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나무들과 꽃들과 풀들이었다.

최갑수 선생님께서 많은 꽃 이름을 알려주셨는데, 그중에 기억나는 것들은 우선 방풍나물꽃, 돌나물꽃, 엉겅퀴꽃, 낮 달맞이꽃, 수국, 무궁화, 등이었다. 보랏빛 엉겅퀴꽃이 무척 아름다웠다. 낮 달맞이꽃은 처음 보는 꽃이었다. 수국도 보라색이 많았다. 최갑수 선생님이 나무 입장에서 볼 때 흰 꽃을 피우는 게 가장 쉽다고 하셨는데, 보랏빛 꽃을 피우려면 꽃의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셔서 갑자기 꽃이 존경스러워졌다. 최갑수 선생님이 가장 최적의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는 서우 나무라고 하셨다 그 외에 섬에 가장 많은 나무가 수나무, 동백, 팽나무, 녹나무,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먼나무 등이라고 하신다. 남쪽 나라 섬에는 잎이 두꺼운 나무들이 많았다.

둘레길처럼 섬의 주변을 돌면서 오른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는 일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해보지 못한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

길을 가다가 통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금오도에 왔는데 갑자기 남북통일이 생각이 났다. 왜 그럴까? 아마 땅끝이어서 남북통일이 생각난 것 같다. 최갑수 선생님이 남북통일은 독일처럼 어느 날 민중들에 의해서 서로 해방을 이루는 시기가 올 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통일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으로 전망하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전망이셔서 갑자기 희망이 생기면서 통일에 대한 마음이 가벼워졌다.

금오도 제1길에 도착 후 하산 길에는 제1길의 종착점인 두포(초포)에 도착했다. 두포 마을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지 집 앞에 지붕까지 오는 돌담이 쌓여 있었다. 돌담을 파고들어서 한 나무가 자라는 모습도 있었다. 섬이라 바람이 많이 부나보다 했는데, 마을에 큰 나무와 넓은 마루가 있어 앉아서 막걸리 한 잔을 마셔보려고 하는 데도 정말 심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루에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어떤 한 등산객이 이 마을에 버스가 있냐고 물어온다. 우리는 “버스 안 타고 걸어갈 것입니다^^” 라고 호기 있게 대답했지만, 곧이어 도착한 버스에 6명이 몸을 후다닥 몸을 싣느라 정신이 없었다. 버스는 청룡 버스처럼 산을 가로질러서 달렸다. 길이 매우 가파른데도 버스는 잘 달렸다. 섬사람들은 다들 느긋하고 익숙하게 대응하시는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남면 마을에 도착하여 여남초등학교, 여남중고등학교, 남면보건지소, 남면우체국 남면파출소 등을 지나고 내외진을 지나 본동식당에 도착했다.

본동식당에서 생선구이와 생선회 생선지리 등을 맛있게 먹었다. 회 뜨고 난 생선들을 아무 양념 없이 마늘 생강 소금만 넣은 듯한 생선지리는 정말 영양가 있는 음식이었다.

금오도의 산행길은 잘 정비가 되어 있지만, 좀 더 표지판을 달아서 좀 더 구체적인 지도나 안내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군데군데 큰 돌들이나 바위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바윗돌들을 흙으로 덮어서 바닥이 평평한 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끝나고 다시 여천여객선터미널 근처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는 섬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바닷가에 있는 독채였는데, 고기 잡는 어부와 그 가족이 살았던 매우 소박한 집이었다. 할머니가 혼자 사시기 힘들어 육지로 가시고 남은 집을 이웃이 사서 민박집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가 저녁 8시 30분경이 되었는데, 어둑어둑하여 집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오래 전에 산이 해변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집이 지어졌고, 아주 작고 왜소한 집이지만 바위 위에 견고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집 앞에 큰 바위가 마당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담장 한쪽에 1m도 채 안 되는 작은 철문이 있는데, 주인장께서 문으로 나가면 바로 해변으로 나간다고 했다. 정말 작고 오래되었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3. 금오도 안산을 거쳐 여수 만성리 학살지까지

 

2024년 6월 2일 아침에 5시 30분쯤 일어났다. 아침에 밖이 밝은 기운에 일어났다. 뒷산에서 새소리가 났다. 섬에서 하룻밤을 잔다는 게 참 좋았다. 모처럼 푹 잠을 잘 자고 일어났다. 짐을 다 챙기고 밖으로 나가니 아침 바다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과 밤에 보던 바다와는 또 다르게 푸른 잔잔한 바다였다. 아침 7시경 아침 식사를 하러 떠났다. 금오도와 연결된 최남단의 안도에 있는 민박집에서 맛깔나게 나오는 전라도의 반찬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왔던 반찬들은 방풍나물, 꽃게장, 오징어 젓갈, 김무침, 갓김치, 파김치, 배추김치, 고등어 조림, 미역국(양대라는 생선을 넣은 미역국), 멸치볶음, 열무김치, 우무 등이었다.

아침을 먹고 안도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볼 계획이었으나, 배 타는 시간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당산공원만 들렀다. 당산공원은 당제를 지내던 곳으로 현재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당제를 지내지 못하고 당산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당산에 있는 나무 밑에는 비석에 “당제 (가묘) 당제는 춘추로 지냈으며, 산신, 지신, 중앙지신제를 올리고 이곳에 제물을 먹었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산에 있는 나무들은 몇백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있었던 듯 거대한 모습으로 검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주변에 동백나무도 줄기가 굵고 잎이 무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당산을 돌아본 후 안도에서 다시 금오도 여천여객터미널로 가서 여수까지 가는 배를 탔다. 배에 엔진소리가 매우 커서 90 DB 이상이 되는 것 같았다. 배의 엔진소리가 소음성난청의 위험요인이 될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왔다 가지만 주민들은 거의 매일 배를 타야 할 텐데, 배에서 이렇게 큰 엔진 소음이 나면 청력이 금방 손실되겠다는 우려가 생겼다. 배의 소음 때문인지, 바다의 멋진 모습이 잘 들어오지 않았고, 20분을 이렇게 소음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배는 여수 돌산 신기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칠공주 장어집으로 갔고, 최갑수선생님께서 장어구이와 장어탕을 사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이무성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이 만성리 학살지였다. 여수시가 세운 표지판에 만성리 학살지(The place of Manseongri Massacre)에 대해 “지역 주민들이 용골이라고 부르던 만성리 학살지는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부역 혐의자로 수용되어 있던 민간인 수백 명을 이곳으로 끌고 와 집단학살한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지역주민들이 만성리 학살지로 부르던 이곳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정부가 여순반란사건에 부역했다고 혐의를 씌운 부역 혐의자들 수백 명을 학살한 후에 이 만성리 계곡에 묻었다고 한다.

만성리 학살지는 바닷가 도로변에 바로 있었는데, 그 자리가 너무 좁아서 차를 정차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고, 가로 길옆에 급경사로 되어 있어 자동차 한 대도 쉽게 대지 못할정도로 비좁아 아쉬웠지만, 여수시에서 여순반란사건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는 기억의 장소를 마련한 점에 대해서는 감사해야할 일이었다. 향후 여수시에서 이곳에 많은 후손이 와서 보고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역사의 장소를 조금 더 확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성리 학살지를 돌아보고, 오후 4시경 여수엑스포역에서 서울로 가는 ktx에 오르는 것으로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사진0.금오도 산행 참가자들

 

사진1.금오도 산행길

 

사진2.금오도 섬의 높은 돌담

 

사진3.금오도 섬의 높은 돌담

 

사진4.금오도의 아침

 

사진5.금오도의 아침 햇살

 

사진6.금오도 안산의 당산

 

사진7.금오동 당산의 비석에 있는 내용을 설명해주고 계시는 최갑수선생님

 

사진8.금오도 안산 바닷가 절경

 

사진9.금오도 대나무

 

사진10.금오도 동백나무

 

사진11.금오도 동백나무와 박상환 선생님

 

사진12.여수 만성리 학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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