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커먼즈 재잘재잘 후기 (서도원 연세대 미디어문화연구 박사과정)

활동소식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는 어떤 학문이든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과 ‘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두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진정한 지식이라면 남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지식을 알았을 때 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부연한다. 엄밀하기보다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거칠게 발화된 문장이지만, 콜린스의 통찰은 사회적, 학술적 의의라는 학문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공부를 한다는 것, 특히나 인문 사회 계열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 모종의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의를 목표로 하고, ‘지금까지 나왔던 이야기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를 겨냥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계속’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부의 목적과 정의를 분명하게 내린다고 하여도, 어떻게 하면 그러한 공부의 지향점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회적 변화와 학술적 성취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도(學徒)로 하여금 공부의 의의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만드는 현실적 조건과 방법이 고민될 필요가 있다. 이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점은 일찍이 마르크스가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문제일 것이다. 학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길도 먹고 살 수 있어야 고민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호네트(Axel Honneth)가 말했던 인정의 차원도 중요하다. 정체성이나 주체 등 어려운 논의를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자신의 씨름이 무의미하지는 않은지 등의 고민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 나아갈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사회적 부정의를 경제적 재분배 패러다임과 문화적 인정 패러다임으로 나눈 것도 이러한 고민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배와 인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오늘날의 학술 장에서 (경제적) 분배와 인정을 동시에 제공받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서 ‘구조적’이라 함은 인문사회 계열의 학술장이 처한 상황이나, 개별 학술장의 문법 등의 요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학술장의 분배와 인정이 딜레마적 상황에 놓여있음을 가리키려는 표현이다. 다른 사회적 단위들과 비교했을 때, 학술장은 유독 인정 체계가 단일화된 공간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러 직무가 필요하기에,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능력 역시 다양하다. 꼼꼼하게 단순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창의성을 발휘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 등 다양한 능력들이 각자 필요에 맞는 상황에서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사람은 대학원 등 학술장의 문법에 따라 좋은 글을 쓰는 것만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심지어 이때의 인정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만 주어질 수 있다. 타인으로부터 오는 공적 인정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돈이라는 변수는 인정 체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물론, 공부를 하고 싶은 열의가 있는 학생들에게 시스템적으로 적절한 돈이 지급된다면, 공부를 ‘계속’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의 권력과 권위를 배가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교수 개인의 인성과는 무관하게, 학술장의 인정 체계가 더욱 단일화되고 공고하게 변하는 것이다. 이때의 학생은 공부의 과정을 즐기기보다 결과로 인정받는 체계 안으로 더욱 편입되어야만 한다. 반대로 돈이 지급되지 않으면 인정 체계가 다변화될 수 있을까? 일면 그런 부분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상황은 같다. 공적 기준이 해체된 몇몇 예술장에서, 자신의 돈으로 개인전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기 용이한 것처럼, 재산이 있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들만 학술장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공부 과정에 관한 인정 획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들, 자신의 생업에 시간을 쓰는 학생들은 과정에서의 인정을 획득하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재생산에 관련된 시간을 포함하여) 넉넉히 학문에 사용할 수 있는 경제 조건을 가진 학생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 분배와 인정을 함께 제공하기 위해 오늘날 많은 대안적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있다.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 ‘쌓아둔 재화’가 아니라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만들어진 커먼스나 결과가 아닌 과정을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술 단체 등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들은 주체보다 연대가 선재(先在)한다는 코뮤니타스적 실천을 각자가 생각하는 중요성에 따라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가능성과 기회의 측면을 제한하지 않고자, ‘판단’하기보다는 ‘연대’하려 하는 대안 학술 공동체도 존재한다. 분배와 인정을 모두 균형있게 제공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역시 획일화되지 않은 상호인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제공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듯하고 날카롭게

  그러나 중요하게 되짚어보아야 할 점은 학술장에서 분배와 인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맥락과 초기 질문이다. 물론, 공부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돈과 타인의 인정이 필요하다. 이에 경제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나, 서로의 공부 과정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연대도 등장했다. 심지어는 무엇을 위해 연대할지 고민하기에 앞서, 불안정한 미래 앞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목적으로 연대하려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학술적 연대들은 어디까지나 ‘공부’를 하기 위함이고, 공부의 목적은 사회적, 학술적 의의를 향해 있다. 따라서 무조건적 자본 추구나 무조건적 연대는 주객이 전도된 움직임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비판적인 관점 없이 서로의 공부 과정만을 응원하는 연대는 수단이 목적을 대체해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배와 인정의 딜레마에 놓은 오늘날, 학술장에서 필요한 태도는 따듯하면서도 날카로운 온도이다. 물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끔 따듯하게 환대해주는 한편, ‘공부’를 할 수 있게끔 첨예하게 비판하고, 서로의 펜 끝을 다듬는 연대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커먼즈의 재잘재잘 행사는 함께 ‘계속’ ‘공부’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장이었다. 발표 제안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던 나는 두 차례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첫 번째는 연구자의 집 문을 연 순간이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으나, 솔직한 표현으로 그곳에 ‘선생님’은 없었다. ‘즈베즈다’, ‘쓰바씨바 라마스떼’, ‘J’ 등 알록달록한 안경을 쓰고 방석을 뒤집어쓴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만 있었다. (아직까지도 박배균 선생님을 떠올리면 ‘왕뚜껑’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아직 새로운 나라에 적응하기도 전에 행사가 반말로 진행되었는데, 이 역시 사전에 소개를 들었음에도 익숙치 않았다. 비단 직함이나 나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초면에 말을 놓는 것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색함이 감사함으로 바뀌었던 것은 학생들이 권위와 위계를 느끼지 않게끔 선생님들께서 최대한 몸을 낮춰 환대해주시려는 의도가 읽혔기 때문이었다. 또한, 행사의 형식이 아니라 관계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환대의 정서가 느껴졌는데, 이는 행사참여자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으려던 선생님들의 말 건넴 덕분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회적 의례들이 서로에게 폐끼치지 않는 선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재잘재잘에서의 대화들은 사회적 문법에 맞춘 호응을 넘어서 상대방의 관심사와 성향에 관한 궁금증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충격의 순간은 오히려 행사를 진행하는 과정이었다. 탈권위적인 환대 방식과는 별개로, 재잘재잘에서는 어느 누구도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과, 비판을 받는 사람 모두 진지한 궁금증과 고민들로 대화를 진행했고, 비판이 날카로울수록 상대방을 포함한 여러 사람의 호응을 받았다. 이러한 질의응답 과정은 한편으로 자신의 내적 논리가 치밀한지 여부를 검토한다는 측면에서 고민의 깊이를,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전공의 관점으로 질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민의 넓이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그러면서도 각자의 전공과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태도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평가의 자리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자리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때의 집합적 열광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의도나 권위의 재생산 등과 관계없이 오로지 공부의 목적을 향해 있었고, 서로의 언어가 닿는 지점의 희열은 사회적, 학술적 의의를 찾는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여, 환대와 비판이 공존할 수 있음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몰입하여 대화를 나누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수 시간이 지나있었다. 

사방에서 재잘거리는 연대를 향하여

  공부를 하고있는 과정에서 학술적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필요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인정이 필요하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두 지향점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위계를 걷어내면서도 학문의 의의를 겨냥해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점은 비단 행사의 형식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같은 방향성을 바라보고 있어야 바로 설 수 있다. 이번 재잘재잘 행사는 이 두 가지 지향점이 실제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하나 되어 공부로 즐거워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하였다. 앞으로의 과정에서 형식이 어떻게 발전할지, 구성원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성공의 사례가 재생산되길 희망한다. 비단 이번 행사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서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진지하게 학문에 임하면서도 학술적 과정에서 연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사방에서 재잘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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