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집 회원 인터뷰10 (이미애 운영위원)

활동소식

인터뷰 일시 : 2024년 4월 8일(월) 오후 8:00 ~ 9:30

장소 : 줌 온라인

인터뷰이 : 이미애 (연구자의집 연구안전망팀,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진행 : 박서현 (연구자의집 미디어팀, 제주대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연구자의집과 R커먼즈 합정 

 

진행자 ‘지식공유 연구자의집’(연집)은 “대학 안과 바깥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유연하게 연대할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학술운동을 통해 실천적 아카데미즘을 복원[하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 커먼즈’를 만[들며] ‘연구안전망’ 구축을 위한 연구자들의 상호부조 방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2019년 1월 26일 창립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연집에서 활동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미애 정말로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정말 우연히 연집의 공간, R커먼즈 합정(R커)을 찾아갔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연구자라면 누구든 언제든 사용해도 된다는 홍보를 접했습니다. 당시 저는 비정규직 강사로서 연구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 전에 잠깐 R커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마침 R커 개소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발을 딛게 됐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내용들에 비교적 다 동의가 되었습니다. 직접적인 것은 비정규직 강사인 제가 연구자 권리 확보에 당사자로서 나서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활동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구요.

 

진행자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신 R커에서 공간지기로 활동하셨는데요, 먼저 R커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R커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지, R커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R커의 공간지기였던 동시에 연집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시는데요, R커와 연집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혹은 양자가 향후 어떻게 연관되어야 한다고 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미애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위와 같은 식으로 R커를 찾아왔습니다. 이후 공간지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구요. 저는 정기적으로 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어서 당시 R커를 많이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강사실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대학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4-5시가 되면 문을 닫습니다. R커는 제가 자리를 잡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연집에 먼저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R커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R커를 많이 사용하다보니 당연히 공간지기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사용자로서 공간지기로 당연히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간지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공간지기를 하면서 연집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어 순서상으로는 공간지기가 먼저 운영위원이 다음이었습니다. 운영위원 중 공간지기부터 하신 분은 별로 없으실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공간지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간을 누군가가 지키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행자 네. 저도 누군가가 매일 나오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애 저는 세대와 상관없이 또는 학문적 권위와 무관하게 서로의 연구와 고민, 문제의식을 나누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연집에서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고 구성원 각자는 너무 바쁩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연집과 R커가 얼마나 그 취지를 잘 살리면서 같이 운영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습니다. R커라는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연구자들의 연대활동이 필요한 것인지 의구심이 있습니다. 비물질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대 혹은 연구자들 사이의 어떤 공동활동이 R커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면 R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R커가 토대가 되어 연집활동이 활성화된다면 R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역으로 연집 자체가 R커를 포함하는 게 아닐까라고도 생각합니다. 양자가 별개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고요. 저는 연집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면 그 자체가 R커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연집과 R커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기도 합니다. 연집은 다양한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나누고 사적인 얘기도 나누고 공부하고 대화하고 밥 먹고 연대하는 곳이 아닐까요?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 자체가 R커 아닐까요? 저는 연집과 R커의 관계가 헷갈렸는데요 두 개가 분리돼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행자 말씀을 들으면서 R커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R커가 있는데요, 물리적 공간은 그 공간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동, 비용 등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연대활동을 포함한 비물질적 활동들이 R커에서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R커라는 공간이 꼭 거기에 있어야 되는 것인가, 나아가 물리적 공간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고요.

 

이미애 저는 학부에서 건축을 전공하기도 했는데요, 제 생각으로는 너무나 당연히 연구자의 ‘집’ 그 자체가 물리적 공간입니다. 그래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R커에 대해 얘기한다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R, 커먼즈 모두 직관적으로 잘 안들어오는데 반해, ‘연구자의 집’이라는 개념은 쉽게 이해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물리적 공간의 필요 여부를 떠나 일단 R커가 지향하는 바는 세대를 넘고 권위를 넘어 연구자들이 연대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일텐데요, 만약 그렇다면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개념틀을 가지고 접근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별도로 제가 불편했던 것은 특정 대학 중심의 R커라는 점이었는데요, 특정 대학 재학자 및 졸업자, 재직자들이 많았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되어 있기도 하여 이분들이 R커의 취지하에 모여 있는 게 맞나라는 의구심도 사실 좀 들었습니다. R커가 없어도 특정 대학공간에서 만나기에 별 문제가 없는 분들이 R커라는 공간을 만들어 또 만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여기 모인 연구자들 개개인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며, 단체 구성원의 구성 방식에서 잠재적 구성원이 느낄 진입 장벽이나 이른바 서울 ‘명문대’ 출신자들의 또다른 네트워크라는 뉘앙스를 최소화 또는 제거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다양한 연구자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취지에 더 부합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행자 선생님의 불편함은 해소가 되셨을까요?

 

이미애 지난해 진행자 선생님도 함께 참여했던 집담회가 있었지요. 저는 그 모임을 끝으로 공간지기를 그만두게 되었는데요, 역시 문제는 제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아서 생기는 한계이지 않은가합니다. 처음부터 함께 했던 분들이 축적해온 것들을 제가 공유하지 못해서 어떤 부분은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또 있을 테니까요, 제가 생각한 문제를 다른 분들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저는 R커에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재미있을 것 같다고, 그런 여지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정 대학과 무관한 좀더 다양한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좀더 적극적으로 모색돼야 그런 여지가 커지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했습니다. 활동 당시 저는 그런 것을 미처 잘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후의 상황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여러 가지 것들이 그 안에서 긍정적으로 많이 모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운영위와 R커가 잘 교류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여전하므로, 추후 연집 운영위에서 말씀드린 문제에 대해 좀더 논의해야 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자의 권리 증진을 위한 활동의 필요

 

진행자 R커 운영 및 R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활동 이외에도 연집에서는 예컨대 연구자 권리선언 추진, 연구자복지법 토론회 진행, 연구자 공제회법 초안 마련 등을 포함한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 등의 활동들을 진행해왔습니다. 최근 연집은 연구자의 권리 및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연구안전망팀’, 공공성을 갖는 학술지식을 커먼즈(commons)로 이해하면서 지식커먼즈를 구축하기 위한 ‘지식커먼즈팀’, 외부 기관과의 협력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대외협력팀’, 그리고 각 팀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사무국’으로 운영위원회 하위 분과를 개편했습니다. 각 팀이 진행하는 활동들 모두 중요한 활동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혹시 이러한 활동들 중 연집에서 보다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이미애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제가 처음부터 활동한 것이 아니어서 연집의 전사를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 전제하고 말씀드리면, 말씀하신 활동들에 지금까지 제가 많이 개입돼 있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연구안전망팀에서 다른 학술단체들과 연구자복지법 추진단을 꾸려 공제회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상황인데요, 아직 본격화돼 있는 지점들이 잘 보이지 않은 부분도 있고, 제가 많이 참여하지 못해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어 무엇을 해야 된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단 저는 연구안전망팀에서 활동하고 있고 하고자 합니다.

저는 6년 차 대학 시간강사, 2년차 독립 연구자입니다. 그리고 최근 다행히도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로 선정되어 5년 정도는 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는 강사를 해오면서 가진 여러 문제의식이 쌓여 있습니다. 학술계에서 학술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분절돼 있는데, 분절돼 있는 사람들이 공통의 문제의식을 갖고서 어떻게 권리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저는 관심이 많고, 우선 이 부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연집에서는 초반에 연구자복지법을 표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로 인하여 복지법에서 공제회법으로 추진 내용이 변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공제회법이 적절한 방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강사로 일할 때 제가 느꼈던 문제들은 공제회법 형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그런 것인데요, 제가 연구안전망팀에 합류하여 좀더 가능성을 열어놓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개방적으로 접근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해왔습니다. 저는 대학의 구조적 문제들과 함께 이 문제들을 다루는 가능성을 좀더 모색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 강사노조에 가입돼 있어 현재 제가 속한 대학에서 노조지회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싶습니다. 이런 생각과 지금 연집에서 추진하는 공제회법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노조지회를 만들고 또 일종의 산별 노조처럼 연구자들만의 거대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져야만 위계의 문제들이 정리되거나 없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구조적인 문제(대학 무상화 및 국공립화, 평준화)에도 관심이 있는데요, 이 부분은 교수노조나 민교협에서 관련 활동을 하고 있고 또 비정규직 교수노조에서도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별적으로 다 이루어지고 있어서 말씀드린 단위들이 합쳐져서 함께 교육문제라든가 연구문제를 같이 논의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집 운영위원으로 어떻게 활동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진행자 결과적으로 선생님께서 연집 활동들에 많이 참여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텐데요, 역으로 보면 연구자 공제회법이나 복지법 토론회가 선생님의 문제의식과 딱 접속되지 않은 측면이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애 말씀하신 게 맞는데요, 무엇을 함께 해야겠다고 했을 때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하죠. 그래서 지난 ‘제7회 연구자복지법 토론회’에 제가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때 처음 연구자복지법 논의를 접했던 상황이어서 나름 성심껏 토론을 준비했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이루어진 논의들을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앞서의 논의들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얘기를 반복해서 들을 경우, 뒤늦게 결합한 사람이 동력을 더 갖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제가 가졌던 느낌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의구심을 갖고 여러 질문들을 제기했는데요 이에 대해 그동안 참여하지 않아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라거나 앞서 이미 논의가 다 된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의구심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제 더 물어보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경제·인문사회연구소의 지원으로 진행한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 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에 참여한 특정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됐기 때문에 나머지 분들이 이 문제에 개입하여 어떤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는 있지만,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하기 위한 조직화가 아직 충분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저 자신이 그랬습니다. 저는 강사로서의 제 위치를 점점 더 알아가고 있었는데요, 강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연집의 활동이 연결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국공립대학에 비해 사립대학 강사비는 거의 절반에 가까울뿐만 아니라 강사들에 대한 처우는 정규직 교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육 및 연구주체들의 처우는 분절화, 위계화되어 있죠,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와 연집의 활동 사이, 즉 강사로서의 권리문제와 연집에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공제회법과는 큰 거리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의 권리문제와 연집의 활동을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저의 숙제입니다. 저는 연집에서 공제회법을 통해 하려는 것이 정확히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가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직 공부가 덜 돼서이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연집의 비정규직 강사들이 당사자로서 더 열심히 참여할 동력이 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제회법이 분절된 불안전연구노동자 누구에게나 정말 필요한 제도라는 호소력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참여하고 있는, 오는 8월 말 출범식을 앞두고 있는 <연구자 안전망 제도화와 연구자복지법 제정을 위한 공동추진위원회> 활동을 통해 앞으로 알아가볼 작정입니다.

 

진행자 학술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떤 하나의 방법이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선생님께서 분절화돼 있고 파편화되어 있는 연구자들의 상황을 문제적으로 보시면서 이러한 분절화를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갖고 있으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신 부분을 좀더 소개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애 저는 박사학위를 2018년 말에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드린 문제의식은 제가 비교적 최근에야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온 후 계속 들었던 생각은 대학의 구조변화와 함께 연구자들의 권리나 입지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파편화되어 있는데요, 비정규직 교수노조, 민교협, 교수노조, 연집 등 모두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대학의 국공립화, 평준화를 추구하는 연대모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의 국공립화와 연구자의 권리 증진이 함께 이루어지는 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적으로 큰 틀이 필요하고 이 틀 안에서 장단기적으로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10~30년의 장기 계획과 단기 세부계획을 세운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봅니다만, … 그런데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요, 앞서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논의들의 결과로서 현재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연집은 이러한 논의들을 얼마나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 궁금합니다.

 

진행자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연구자의 분절화와 관련하여 연구자의 생애주기가 다양하다는 점을 지적한 인터뷰가 생각났습니다.

 

이미애 다양한 위치에 놓여 있는 연구자가 있을텐데요 저는 그 위치에 따른 처우의 차별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저만 해도 표준에 끼워맞출 수 없는, 생애주기가 덜 보편적인 사람인데요. 다양한 생애주기 안에서 공부를 하거나 멈추는 것은 각자의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생애주기에서 어떤 연구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기본적 삶이 구축되어야 하겠죠.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드는데요, 연집에 오는 사람들이 연구자로서의 자기 선언도 하고 자기의 취약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모아져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강사로서 겪었던 것들과 제 주변 사람들이 했던 얘기들을 강사로서의 취약성에 대한 얘기들로 모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들이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 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에 어느 정도 담겨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운동에 있어서 연구자의 주체성, 당사자성이 좀더 강조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생애주기를 가진 연구자들의 자기경험들이 모여서 다시 구조적 문제로 재유형화되어 공통되는 것들을 묶어내는 방식을 말합니다.

 

학술운동의 영향과 과제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연구자의 권리 및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활동이나 지식커먼즈를 구축하기 위한 활동은 예컨대 1980년대 후반 한국 학술운동과는 구분되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 것일지 궁금합니다. 관련하여 만약 이전의 학술운동과 구분되는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오늘날의 학술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연집 학술운동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미애 1980년대에 저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당시 시대적 상황의 영향인지 안양지역 사회과학 독서 운동 모임과 교내 전교조 합법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아마도 1980년대 학술운동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의 수혜자이지 않았을까합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경기도 안양에 있었는데요 당시 지역사회에는 청년 운동단체가 있었고 비평준화를 끝까지 유지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학원도 발달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학원 선생님 지도 아래, 사회과학 지하서클에서 독서 및 역사 현장 체험 활동을 했고, 전교조 해직 선생님의 복집투쟁을 도와 포스터를 붙이는 등의 지지활동에도 참여했죠.

1990년대 대학에 입학했는데 공과대학을 다니다 보니 저는 학술운동보다는 현장운동에 관심을 더 가졌습니다. 1991년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시위에 참여했고 1980년대 학술운동의 유산일 듯 한데, 농촌봉사활동 등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건축과를 다닌 덕에 철거운동, 철거민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소속 학과의 관련 동아리 활동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주거권 관련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장 활동은 당시 학술운동, 민주화운동의 영향이었을 테고, 저는 그런 운동들의 수혜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생애주기를 살아가면서 여러 구조적 모순(직장 및 결혼·육아에서의 남녀차별, 주거 및 계층 문제 등)을 느끼고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도 그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조적 모순을 제거해가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오히려 모순들이 계속 쌓여가는 상황에서 이를 넘어서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30대 중반에 공부를 통해 구조적 문제를 다시 이해하고 이를 제거해가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의 생애주기에 매몰돼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되돌아보면 왜 이전의 생애주기에서는 안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구조적 모순을 넘어서는 과정이 왜 안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0년대에 대학에서 1980년대 학술운동의 의미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문의 장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은 제가 느낀 모순들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처럼 유학을 가서 박사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만약 학술운동을 통해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이는 구조적 이해가 아닐까, 현재 상황에 매몰돼 있어 잘 파악하지 못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이러한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해 입체적·구조적으로 이해해보며 인식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유투브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감각적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자신이 그동안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바꿔낼 수 있는 어떤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일텐데요, 즉 고민하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어야 하고 바쁘지 않아야 됩니다. 일이 줄어야 되고요. 관련하여 저는 연집이 만약 일상에 매몰돼 있는 일반인들과 접촉의 폭을 넓힌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만. 연집의 선생님들이 다 각자의 연구주제를 갖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제 연구주제는 이주, 여성, 노동 문제이구요, 최근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일어난 이주 노동자의 사회적 참사와 같은 이슈가 있을 때에는 한나절 또는 반나절 시간을 내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에 대해 알려주는 활동을 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연집에서 하는 여러 활동이 기존의 콜로키움이나 세미나와 별 차이가 없는데요, 이런 활동을 할 때에는 밤새 PPT를 준비하여 발표를 하는 식이 되지요. 그런 게 아니라 며칠 몇 시에 궁금증이 있는 분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는 식의 활동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의 학술운동이 지금의 학술운동이지 되면 좋지 않을까합니다. 어려운 이론투쟁도 필요하지만, 대민 접촉면을 늘려가는 방식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일반인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는 방식의 하나로서 유투브를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연집에서 ‘주제별 연집 유튜브’ 형식의 활동도 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주·가사·노동에 대한 연구

 

진행자 선생님께서는 이주, 가사, 노동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고서 예컨대 프랑스에 정착한 조선족 여성 같은 소수 이민 여성이 처해 있는 위계적 노동관계 등을 연구해오셨습니다. 선생님의 연구적 관심 및 선생님께서 이러한 관심을 가지시게 된 이유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미애 긴 세월에 대한 압축적 얘기가 될텐데요, 저의 생애와 저의 연구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0대 중반까지 ‘일반적인’ 생애주기를 살고 있었습니다. 생애주기 안에서 느낀 여러 부조리들이 있었습니다. 직장생활하는 여성 노동자로서의 저의 위치는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적으면서 발언권이 많은 상관들이 근무시간 외의 장소에서 결정한 사안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직장생활을 꽤 오래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녀 간의 차별적 위치에 대한 고민이 쌓였고, 결혼생활에서의 남녀 간에 위상 차이, 가부장적 권력과 관행에 대한 고민이 또 쌓였습니다. 동시에 아이를 키우며 독박육아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위상이 그랬습니다. 또한 당시 저는 전셋집에 살면서 2년 마다 이사를 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죠. 이 모든 것이 20대 후반, 30대에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쌓이는 상황에서 30대 중반에 석사를 시작했습니다. 문화연구학과 입시 연구계획서에 제가 그동안 쌓아왔던 고민들, 주거권의 문제라든가 직장에서의 남녀의 차별 문제라든가, 가족 내 차별 문제 대한 사회 저변으로부터의 문화적 변화가 요청되며 그런 연구를 하고 싶다고 썼습니다. 당시 대학에서 저는 다소 예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30대 중반의 엄마이면서 일하는 여성이기도 했으니까요. 계속 공부를 해온 분들과는 생애주기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었고 또 공과대학을 다니던 사람이 인문사회과학으로 넘어오니 선생님들은 제가 새로운 분야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다보니 소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경계인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수자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인 것 같고 2008년 석사논문의 주제도 이주민 여성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초기 이주민은 조선족이었고 제가 언어 능력이 탁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통가능한 이주민을 연구할 필요가 있어서 조선족 여성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또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가리봉동이라는 특정 지역의 공간적 정체성을 함께 고민하게 됐습니다. 조선족 여성들을 인터뷰해가는 과정에서 이분들이 가진 노동에 대한 사고가 저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식당 고용인 몇 분은 퇴근시간이 되어도 퇴근하려고 하면, 사장이 자신이 퇴근하지 않았는데 왜 퇴근하느냐고 야단을 하고, 식당 매출이 안 좋으면 경영자 탓이지 왜 자기들한테 스트레스를 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시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들을 저렇게 다르게 받아들이는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면서 추적해 들어가보니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의 권리의식에 대한 유산이었고, 이 지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인터뷰이들이 식당의 노동자와 식당 주인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적 관계들에 대한 고통을 많이 토로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권력의 위계 속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내 말을 들으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선생님이 됐든 부모가 됐든 어려서부터 저는 그런 것에 반감이 심했었죠. 이런 성향이 제 문제의식의 성장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봅니다.

유학을 가서는 이주민의 삶에 대한 토대로서 이주민 주거에 대한 비교 연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상황과 프랑스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 연구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다시금 제 상황에 대해 반추하게 됐습니다. 프랑스에 유학온 가난한 싱글맘 유학생으로서 경제적 문제와 아이를 돌보고 공부를 이어가는 일을 한꺼번에 수행해야 되는 것이었는데요. 이 상황에서 제가 주목하게 된 것은 가사노동자였습니다. 제 자신에게 온전히 부여된 공부, 돈 벌이, 육아 및 가사노동의 동시 수행, 이게 과연 가능한가 또는 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떻게 잘 자랄 수 있는지, 가난한 유학생인 엄마는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수 있는지, 왜 이 중요한 사안을 싱글맘인 저혼자 책임지도록 구조지워져 있는지, 이 어려운 육아나 가사노동은 왜 하찮게 여겨지는지, 가사 및 돌봄노동,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어릴 적 경남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사짓던 엄마가 수도권에서 가사노동자나 식당노동자로 일 했던 것도 생각났구요. 여성들이 하는 유무급 가사노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민하게 됐으며 이것이 제가 계속해서 이 연구를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가 전근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측면들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역사가 선형적으로 발전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으로 확대되었죠. 끈질기게 남아 있는 과거의 관습, 규범, 위계에 대해 고민했고 이러한 고민이 연구를 계속 이어오게 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리자면, 연구 하고 아이 키우며 집안 일 돌보며 동시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말 숨이 턱에 찼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긴 문제의식 하에 공부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위계적 노동 관계 및 차별적 노동조건 등의 문제들을 풀어야 사회 전반의 변화도 함께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향후 활동·연구 계획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연구적 관심과 연집 활동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미애 귀국해서 5년 여를 보내면서 그동안 상실됐던 주변이 연집을 통해 조금 구축된 것 같습니다. 같이 활동하는 사람을 만나고 상식이 통하는 대화가 가능한 집단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국 후 제가 2년 여 일했던 조직들 역시 위계가 심했는데, 그 위계에서 벗어나 독립연구가로 살기로 한 후 만난 연집은 유학 기간 동안 상실한 후 재구축되지 못한 제 주변이 되어 주었습니다. 다만 이 안에서 제 연구나 문제의식을 제대로 나누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연집에 같은 분야 연구자가 별로 없어 좀 아쉽긴 합니다. 물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연구자 당사자 권리 운동이라든가 교육자로서의 교육운동에 대한 참여라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있지요.

한편 연구자로서의 더 큰 공통분모는 문제의식을 계속 던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좀 뜬금없더라도 연구자들에게는 얘깃거리가 되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이게 잘 안 됩니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거나 하면 그 상대방은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연구자들의 공간에서는 질문을 던지고 얘기를 나누는 게 서로에게 공격으로 이해되지 않으니 논리를 구축해나가고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나갈 수 있다는 점이 제게는 큰 행복이기도 합니다.

 

진행자 말씀 감사합니다. 연집에서 현재 실천하고 있는 여러 활동들 이외에 추가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활동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연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한국학계에서 담당해야하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혹은 선생님께서 해보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미애 제가 겪고 있는 생애주기의 모순들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사회생활 중에 석박사 공부를 수행했습니다. 답을 모두 얻은 것은 아니지만 모순들을 낳는 구조를 조금은 이해하고 이제 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연구를 통해 풀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만나는 사람들도 다들 각자의 고민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가족 문제의 경우에는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그 문제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요. 저는 ‘결혼·사랑·가족제도’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이러한 제도들의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측면을 이해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좀 더 구조화, 객관화하도록 돕는데요, 수업 후 학생들 대부분은 “왜 이런 걸 진작에 알려주지 않고 이제야” 라며 만족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연구자는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상황들을 더 객관화할 수 있는데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의구심이나 질문들에 대해 구조적이고 입체적이며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유용성을 갖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연집에 가면 특정 주제의 연구자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신 분들 오세요’라는 식으로 무엇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세미나나 컨퍼런스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요. 논문도 계속 써야 하고 공부도 멈추지 않겠지만, 오래 공부했으니 이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나눌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합니다. 말씀드린 대학의 구조적 문제,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데요, 이것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집 운영위원이신 이현정 선생님이 이교수의 책과 사람이라는 유투브 채널을 운영하시지요. 이런 형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 정도 하려면 재주, 열정, 여유, 기술력, 큰 액수는 아니라도 자본도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연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계속 존재한다면, ‘주제별 연구자-시민 사랑방’ 같은 방식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진행자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향후 학문적 과제를 포함하여 학술적 실천의 과제로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미애 한국연구재단 프로젝트가 갖는 근본적 한계가 있어서 제가 이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 무얼 하나 놓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구심이 들지만, 당장 올해부터 2029년까지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프로젝트를 수행할 예정입니다. 프로젝트의 제목은 이주민의 삶의 재생산 담론 및 정책 연구입니다. 세 가지 유형의 이주민, 즉 일명 ‘생존회로’, ‘상층회로’라고 하는 이주민과 재한동포 공동체 및 개인의 돌봄 활동과 노동을 비교 연구하는 것인데요. 세 그룹의 이주민을 만나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각각 한 곳을 선정하여 공동체의 돌봄 활동과 각 공동체 돌봄노동자들의 돌봄 노동의 양상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최근 화두는 제 삶의 재생산입니다. 이 화두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데요, 한국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이주민을 유입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데 여기서 빠진 것은 이미 들어와 있는 이주민들의 삶이 재생산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기존 이주민들의 삶이 재생산되고 있지 않다면, 이주민을 새로 유입하여 한국사회를 재생산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5년 동안 계속해서 연구를 해 나갈 생각입니다.

최근 화성 아리셀 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50인 미만까지 적용되는 상황에서 가장 많은 피해가 난 참사현장이라, 이 법에 따라 빠르게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어 보였습니다. 화성시가 산업재해율 1위 도시라서 그런지, 노동시민단체들이 이미 연대하여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의 몇몇 장면에서 언어와 문화가 낯선 유가족의 상황이 크게 고려되고 있지 않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학 시절과 어린 시절의 국내외 이주와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것들이 익숙하지 않으나 이주 본국에서 익힌 자신들의 의식에 기반하여 삶을 재생산해가는 이주민과의 연대, 상호 재생산의 방법을 고민하려고 합니다. 결국 저와 같은 선주민의 삶의 재생산과 이주민의 삶의 재생산 모두가 이루어지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연구를 할 것 같습니다.

 

진행자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곱씹을 필요가 있는 중요한 화두들을 제기하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61활동소식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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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건화

    긴 내용이지만 관심있게 잘 읽었습니다. 연구자의 집 상황, 독립연구자의 삶과 재생산조건, 학술운동, 이주노동, 돌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말씀에서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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