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란 무엇인가> 북토크 내용 정리 (한디디 연구자의집 운영위원)

활동소식

정리자: 2월 29일 저녁, <커먼즈란 무엇인가> 북토크는 많은 분들이 커먼즈라는 불빛을 따라 알커먼즈에 찾아와 주신 뜻깊은 자리였다.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을 포함해 다양한 사회운동을 해온 활동가 상철님과, 동아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누비는 커먼즈 연구자 영신샘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누구보다 깊이 있게 커먼즈를 고민했다고 단언해도 좋을 두 분이 기꺼이 토론자로 함께해 주셨다. (진정,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커먼즈의 두 고수들이 현장과 이론을 누비며 해온 오랜 고민과 성찰, 촘촘하고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나누어 준 그날의 커머닝-현장을 더듬더듬 기록해 본다. 정신이 없어 미처 기록을 하지 못했는데, 토론자들이 북토크 전 미리 질문지를 보내주신 덕에 기억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또, 기억을 복원하다보니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도 막 생겨서 그런 생각들도 함께 정리하였습니다.

 

1. ‘출간의 사회적 의미’라고 쓰고 ‘응원과 격려’라고 읽는다.

 

상철: 이 책은 매우 반갑다. 한국에서 커먼즈에 대한 유행과 별개로 체계적으로 소개된 적이 별로 없다는 점에 기대어 보면, 가장 최신의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교과서’가 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특히 제도와 규범에 갇히지 않는 관계로서의 커먼즈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현 시점에서 필요한 인식론으로서 커먼즈의 역할을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술적 논의에서 남성 중심의 서사를 주류화하는 오류를 의식적으로 교정하려는 시도는 커먼즈론이 기존 가부장적 사회이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층적인 해방기획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려는 이론이 가지는, 끊임없는 구분짓기를 통한 명료화 대신에 이미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커먼즈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은 커먼즈론의 사회적 확산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한국 사회에서 커먼즈가 뭐냐고 할 때 한디디의 이 책을 권하면 되는 수월함이 생겼다. 

 

영신: 몇 년 전부터 대학에서 일하면서 ‘전환과 공유의 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커먼즈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데이비드 볼리어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나 가이 스탠딩의 『공유지의 약탈』, 피터 라인보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과 같은 책들을 교과서로 이용해 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함을 느껴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한국적인 맥락과 현실 속에서 커먼즈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커먼즈를 향한 욕망과 즐거움을 보여주는 것이 이들 책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커먼즈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반가웠고, 당장 이번 학기부터 교과서로 이용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은 디디가 그 동안 공부하고 실천해왔던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들이 녹아있고, 현 시점에서 그 경험들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연구자의 삶의 기록이며, 공유인으로서 수행하는 커먼즈운동이기도 하며, 지식을 커머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디디: 감사합니다! (부끄부끄)

 

2. 커먼즈란 무엇인가? 개념의 층위를 생각하다

 

영신: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책의 제목을 『커먼즈란 무엇인가』라고 정했는지 알게 된다.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커먼즈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실천되고 있다. 그것은 커먼즈라고 불리는 매우 다양한 경험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디디는 그 다양한 해석과 실천 방식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방식으로 커먼즈를 설명한다. 그것은 활동이면서, 관계이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살림살이의 방식(또는 생산/재생산 양식)이다. 이런 설명은 공동으로 관리하는 자원이라는 설명, 또는 자유주의적 커먼즈라는 초라한 기획을 넘어서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반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개념의 엄밀성을 따지게 되면, 혼란이 초래될 여지가 있다. 활동, 관계, 양식이 하나의 평면 위에 존재하는 개념의 층위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커먼즈, 커머닝, 커먼즈운동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디디는 글 전체에서 이 세 가지 개념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세 가지 개념의 정수를 특정한 활동이나 실천에 둔다는 점에서, 세 개념의 혼용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가령, 공유 활동을 매개하는 특정한 물질적/비물질적 자원 없이도 관계맺기의 활동은 일어날 수 있다. 즉, 커머닝을 커먼즈와 동일하게 설명하게 되면, ‘자원’이라는 이름을 통해 표현되는 물질성의 차원이 삭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디가 3부에서 제시하는 각각의 커먼즈운동들은 특정한 물질성을 매개로 해서 일어난다.

 

디디: 커먼즈를 물질/비물질의 구분을 횡단하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싶었다. 우선, 커먼즈는 다양한 활동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지 않더라도, 활동 속에서 그냥 일어나는/발생하는 것들이다. 일테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함께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들 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떠오르듯이, 혹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함께 할 때 즐거움이건 불편함이건 호기심이건 어떤 정동들이 만들어지고 분위기를 형성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런 활동들이 지속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그러한 활동이 만들어내는 잉여를 연결하는 일종의 인프라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성되는 공통의 감각이나 신체성일수도 있고, 계라든가 두레 같은 다양한 집합적 노동과 분배의 형식들일 수도 있으며, 공유지나 공동우물 같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식일 수도 있다. 이런 인프라들이 다시 커머닝의 활동들을 활성화하며 커머너들을 만든다. 이렇게 볼 때 커머너는 커먼즈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커먼즈적 활동/관계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서 물질적 커먼즈들은 그 커먼즈를 둘러싼 고유한 감각과 심성을 반영하며 활성화하고, 이 심성과 감각들은 분명한 물질성을 갖고 작동된다. 이렇게 피드백 속에서 확장되는 이 각각의 층위를 활동, 활동이 만들어내는 결과로서의 관계, 혹은 양식이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대신 일종의 배치나 흐름으로 설명하고 싶다. 이를 자본주의 또한 상품교환(임노동)이라는 사람들의 일상적 실천을 통해 지속 재생산되는 수행적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그 배치/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과 상상을 보다 일상적으로, 넓게 열어두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3. 방법론으로서의 인류학에 대해

 

상철: 디디가 커먼즈를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방법론으로서 인류학적 방식은, 본인 스스로 경계하는, 커먼즈가 과거의 잊혀진 지점으로 돌아가는 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에 대한 자기 부정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알다시피 디디가 인용하는 인류학자들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의 방법론은 특정한 부족의 현상을 해당 시기 인류의 일반적인 경향성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아마존을 연구하는 해리 워커의 작업은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비유로서 적절하지 않고(바우웬즈는 새로운 상상력이라며 환호하지만, 정작 아마존은 불타고 줄어들고 있지 않나) 애나 칭의 작업은 1세계 학자의 낭만적 서사라는 한계를 지니며(산을 헤매며 송이버섯을 채집하는 노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일한 생계수단일 뿐이다) 크리스토퍼 보엠의 관찰은 수렵채집인을 대상으로 하는 스틸사진의 한 장면과 같다(연구 방법으론 분명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사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류학자들의 이야기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인류학적 서사가 상당히 익숙한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는데, 이런 접근법은 장점이 뚜렷한 것 이상으로 단점 역시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인류학적 증거(이것은 역사적 증거와 다르다)는 주장의 구체성을 부여하고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다. 하지만 그것은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나 결과로서 존재하는 특수성을 휘발시킨다. 특정한 사건은 특정한 인과가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인류학적 접근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건너 뛴다. 이 점이 불만스럽다.

 

영신: 이 책은 커먼즈 또는 커먼즈적 전환의 타당성을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운동 속에서 가져오고 있다. 역사적 설명들은 주로 경제인류학의 성과를 통해서 설명되고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고, 나 역시도 자주 사용하는 설명방식, 방법론이기는 하다. 다만, 여기에는 장단점이 존재한다. 장점으로는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적 구성인 근대국가나 자본주의의 원리들이 지니는 역사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 커먼즈의 원리가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살림살이의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경제학 비판의 시각에서 이 책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는 경제학의 전제가 과학적 분석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신념 체계라고 주장한다(33-34쪽). 수렵채집민이나 원시공동체 사회가 공동생산과 공동분배 시스템 속에서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사회에서 커먼즈가 필요한 이유나 그 역할과 관련하여 어떤 함의를 주는가는 불확실할 수 있다. 즉, 경제인류학적 설명들은 ‘좋은 옛날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다.

 

디디: 인류학적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인류의 일반적인 경향성”이란 없다는 것이다. 즉, 인류학적 사례들을 활용한 것은 인간 사회를 어떤 일반적 경향성으로 해석하고자 해온 주류담론에 대항하기 위한 것, 지금 이 곳의 질서는 영원불변한 것도, 보편적인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인류학자들의 이야기로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라고 상철은 말하지만, 소위 현실의 체계적 분석이라는 것에 힘을 쏟아 온 기존의 좌파운동, 혹은 사회과학도 설득에 실패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현실 분석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내가 인류학적 작업에 기댄 것은 우리가 인식론적 지도를 좀 더 넓게 펼칠 수 있도록, 즉 대문자 역사에서 누락된 이야기들을 불러옴으로써 시야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이는 지금 여기의 분석을 위해서도 필요한 시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구축해온 보편적 인간상인 ‘이윤을 추구하는 합리적 인간’, ‘등가교환’과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세계는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계급투쟁의 과정 속에서 구축된 것인가?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구성되었던 것이지만, 그것을 필사적으로 삭제해왔고 존재하는 커먼즈를 보이지 않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대문자 역사가 누락하고 삭제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와 다른 합리성들의 조우를 통해 우리가 지금 여기와 전혀 다른 세계를 짓는 것이 가능하다는 정동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을까? 물론, 아마존은 불타고 있다. 하지만, 해리 워커가 보여주는 아마존의 커먼즈는 인간을 동질화하는 동시에 계층화해온 세계 속에서 우리가 대항논리로 구축해온 “모든 생명은 동등하니 차별하지 말자”는 기획과는 완전히 다른 평등의 양식을 드러냄으로써 대안적 상상력의 폭을 넓혀준다. 능력 있는 사냥꾼을 체계적으로 경시해온 문화에 대한 크리스토퍼 보엠의 작업은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를 외부로부터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사례들은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 “인간은 원래 이렇다”라는 지금 이곳의 일반화에 저항하는 실천적 도구가 된다. 

정리하자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커먼즈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한 배치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고, 매우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회가 그 점을 의식하고 사회를 구성해 왔다는 것,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었다. 책의 볼륨을 고려하다보니 여러 이야기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지만,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고고학자와 함께 쓴 유작인 ‘모든 것의 새벽’을 추천하고 싶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 특히 수평적 정치체는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는 오류라는 것을 드러낸다. 물론 면밀한 고고학적 증거에 바탕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사냥이나 농경 등 효율성을 위해 필요한 일 년 중 일정 기간에는 경찰력을 동원해 권위적인 국가를 구성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이를 완전히 해체하고 수평적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들의 사례였다. 이런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워졌는가라는 점이다. 

 

영신: 이 문제(경제인류학적 설명이 좋은 옛날 이야기로 치부될 위험)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식은 칼 폴라니나 가라타니 고진과 유사하게 그것을 보편적인 사회경제의 조직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다. 다른 방식은 근대국가나 자본주의 속에서 커먼즈가 처한 상황과 맥락들을 함께 서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클로저를 통해서 커먼즈가 일방적으로 축소·해체되어온 것과는 다른, 그것을 넘어서는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 가능한 방식은 근대세계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커먼즈화와 탈커먼즈화의 이중운동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또 어떤 방식이 가능할까? 경제인류학적 설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인클로저의 과정과 그 효과에 대한 설명 역시 강조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는 커먼즈가 해체되기 전, “인간은 자연-자원을 관리하거나 개척하는 주체가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생명과 삶의 그물망, 즉 커먼즈의 일부입니다.” 이어서 “노동력(인간의 활동)과 자연을 대상화하고, 인간을 그 모든 것을 소유한 주체로서의 개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으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 땅과 신체에 새겨진 마술적 힘을 뿌리 뽑아야만 합니다.”라고 한다(95쪽). 마술과 주술이 해체되고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지배되는 사회, 그 속에서 ‘뿌리뽑힌 인간’은 어떻게 커먼즈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조금 더 나아가자면, 커먼즈론은 근대세계 이후의 독자적인 역사 서술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디디: 도시나 디지털커먼즈처럼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는 커먼즈의 이야기를 나름 강조했는데, 생각처럼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흑 ㅠ)

 

 

4. 우발성과 역량에 대하여, 커먼즈는 운동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생활의 언어가 될 수 있는가?

 

상철: 토론해보고 싶은 부분은 디디가 커먼즈에서 관계성을 돌출시키고 그것의 발현을 우발성에 둘 때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역량’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어디서나 커먼즈적 계기가 있다고 할 때 어떤 것은 커먼즈적 관계로서 등장하고 어떤 것은 그러지 않는가. 디디의 책을 보면 그 답은 결국 커머너에게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커먼즈적 계기는 객관적으로 형성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수련 혹은 수양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커머너들의 노력을 통해서만 발현된다는 것으로 오해된다. 물론 자원으로서의 커먼즈가 아니라, 그리고 거버넌스 등의 제도로서 커먼즈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커머닝의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에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그 말이 커머너를 특권화하는 것이라면, 사실 커먼즈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윤리적 공동체가 된다. 

비판적 실재론의 논지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구조나 주체냐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특정한 현상이 잠재성을 뚫고 등장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즉 어떤 사회에서는 커먼즈적 계기가 나타나는 반면 어디서는 나타나지 않을 때 그것은 왜 그런가를 설명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중요한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런 계기들을 만들어내는 주관적 개입이 사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딴지를 걸고 싶은 부분이 있다. 커먼즈는 (노동의 반대라는 의미에서) 놀이를 통해서 우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러면 그렇게 우연적인 것이 다양성일 순 있어도 대안이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소위 성좌적 발현이라는 건 구체적인 개입이 없어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거다. 형상을 투여하는 것 자체가 인지적 한계를 투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가 모르는 도형으로 별자리를 그릴 순 없다). 그런 점에서 디디는 커먼즈가 사회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는지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커먼즈는 알겠고 착취와 권력 관계에서 벗어난 이들의 논리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국가와 제도와 같은 기존의 장치들을 변화시키는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디디: 커먼즈적 계기는 도덕이나 의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배치와 관계,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떤 도덕, 혹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집합적 통치-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학급회의를 반복하면서, 체계적으로 형식적인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을 습득한다. 이것은, 반장선거라는 (잘 하면 햄버거가 제공되는) 이벤트를 제외하면 무의미한 학급회의를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소외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을 반복한 사람들, 즉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집단적 통치과정의 일부가 되는 정치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일단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이는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내 경우,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그때는 커먼즈라는 말은 아예 없던 시절이지만, 그때 대학 내에는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인 공간이 있었고 그런 것을 접하면서 만들어진 신체적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커먼즈라는 것이 어떤 주체가 만들거나 관리하는 자원이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하고 나누는 경험이나 활동이며, 그 집단적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커머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커먼즈를 주체-객체, 능동-수동으로 포착할 수 없는 중동태로 이해한다.) 다양한 사회운동의 주체라는 것은 결국은 그러한 집합적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일테면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이 분명한 목적이 없어서 실패한 운동으로 분석되는 경향이 많은데, 사실 이 아큐파이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후 자신의 지역에서 다양한 운동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경험들을 더 활성화하는 것이 커먼즈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영신: 현재의 운동 속에서, 자본주의와 사유화, 사적소유를 넘어서려는 현실 운동들 속에서 커머즈가 지니는 타당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하여, 한편으로 커먼즈운동이 무엇을 겨냥하는가, 겨냥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설명의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들은 하나의 ‘운동’으로 보이고,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에 침식된 보통의 생활인에게는 거리가 먼 실천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부분은 커머닝과 커먼즈운동을 구분하지 않는 용법과도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디디: 상철은 커먼즈가 운동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를 묻고 영신샘은 생활인의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는 점이 재밌다(고 이 글을 정리하는 지금 깨달았다). 커먼즈는 큰 개념이고 다양한 차원과 수준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의 차원에서 커먼즈적 실천과 감각에 더 넓게 노출된 사람들이 많을수록 커먼즈운동 또한 활성화되는 것 아닐까. 빈집이 재밌는 것은 ‘주거운동’이나 ‘금융운동’을 목표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가능한한 임금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의 반백수들이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모였을 뿐이다. 이것저것 같이 하며 활성화된 커먼즈의 회로들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감각을 만들지만, 이에 기반한 다양한 시도들은 당연히 다양한 현실의 중력, 자본주의적 감각에 부딪친다. 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지속한 다양한 암중모색과 우발적 사건들이 주거와 금융의 커먼즈를 지향하는, 즉 영신샘이 ‘운동’으로 지칭한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난곡희망의료조합도 마찬가지다. 도시빈민 여성들이 계라는 활동 속에서 맛본 평등한 관계와 수다의 즐거움, 무언가를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감각이 조합의 출발점이었다. 즉, 커먼즈운동은 함께 하는 활동 속에서 맛본 즐거움과 자율의 경험을 확장하고자 하는 모색의 와중에 떠오른 것들, 함께 헤매이며 발굴하고 만들어낸 (자본주의와 다른 방식의 삶을 향한) 무수히 다른 방향을 향한 다채로운 풍경의 길들에 가까운 것 같다. 

 

5. 커먼즈의 제도적 접근을 너무 쉽게 기각하는 것은 아닌가? 커머너들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는 어떻게 조정하는가? 

 

상철: 커먼즈를 형성하는 커머너는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지닌 주체로서 상호 소통하고 교차하면서 소위 커먼즈적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전통적인 부양의 책임과 의무의 관계로서 가족에서 벗어나 새롭게 형성된 책임과 의무의 관계로서 커머너들의 사회가 전제된다. 전통적인 권리와 의무 주체로서 시민이 국가의 상대적 개념이라면, 국가라는 집합적 장치를 거부하는 커머너들은 오히려 커머너들을 (누가 진짜 커머너이고 어떤 것이 더욱 우월한 커먼즈인가 같은) 상대적 개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너무나 쉽게 오스트롬 등이 고민한 커먼즈의 제도적 접근에 대해 기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신: 일상의 커머닝은 어떤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가? 그것은 사회적 자본을 가진, 또는 신뢰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비익명적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 현실의 커먼즈, 디디가 설명하는 사례들에는 양자의 관계가 모두 작용하고 있다. 즉, 현실의 커먼즈의 작동에서는 시민사회 내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 개인적 경험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조정’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는 시민사회에 기반한 커먼즈론으로서 오스트롬의 커먼즈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오스트롬은 공동으로 관리하는 자원을 둘러싼 갈등과 이해관계들의 조정 과정을 면밀하게 연구했고, 그러한 조정 과정의 결과이자 전제로서 ‘좋은 제도’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디디의 글 속에서 등장하는 현재의 사례들은, 이에 대한 디디의 서술은 아나키즘적 전망 속에서 규칙과 경계의 존재를 폐쇄성으로 인식하고 곧장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힌다. (비공식적 규칙이나 규범이 존재한다는 뉘앙스는 존재한다.) 그리고 ‘좋은 제도’의 역할을 선의와 지속적인 활동의 역할로 대신한다. 시민사회론은 선의와 선의, 이해관계와 이해관계, 정당성과 정당성 사이의 충돌의 가능성을 상정하며, 공적 토의를 통해 공공성을 실현하는 더 나은 집합적 결정과 제도형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오스트롬은 이것을 무임승차자에 대한 제재의 문제로 파악한다. 이 문제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의 형성과 비판이라는 문제로 대체될 수는 없을 듯하다. (커머너들 사이의 불화와 갈등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사례에서 드러나는 이 문제들이 개념적 설명에서는 누락되는 듯하다.)

 

디디: 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한국의 “빈집”이나 “공유지”, 베네수엘라의 협동조합 “쎄코쎄솔라”와 같은 사례들은 그 갈등-조절, 다수결이 아니라 계속되는 대화와 회합들을 통해 전체적 감각를 맞추어가는 경험의 지난함을 잘 보여준다. 이 비효율과 지난함(으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적 영역을 따로 관리하는 관리인을 두기도 하고, 누구나 따라야 하는 절대적 규칙(법)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커먼즈는 그 지난함, 함께 하는 것의 즐거움과 고통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통의 감각이며 신체성이다. 즉, 커머닝이란 그 정의상 부딪침, 갈등을 포함하는 것이며, 그 차이들의 회합 속에서 새로운 공통감각을 생산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과정은 제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제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이 공적 제도와 다른 점은 (오스트롬이 이야기했듯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것으로, 각각의 맥락과 특이성 속에서 구성되는, 즉 보편적일 수 없는 것인 동시에 구성원들의 공통감각과 함께 바뀌어갈 수 있는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즉, 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제도라는 단어가 많은 경우 매우 제한적인 의미값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커먼즈적 제도나 통치를 현재 자유주의 정치체제의 문법으로 환원하거나 그러한 제도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힘은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커먼즈는 임금노동과 핵가족, 복지제도라는 것을 중심으로 짜여진 자유주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장소에서 가장 선명하게 만들어져 왔다. 한국의 60-70년대 판자촌에서 소위 “사회적 경제”의 자생적 씨앗들이 싹텄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커먼즈의 실천은 분명 현실의 제도를 밀어올리는 힘이 되어왔다. 그러나 현실의 제도들은 커먼즈의 구성적 힘들을 관료적 언어로 바꾸어버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근대 국가와 시민사회가 성립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른바 하층민, 임노동자 계급에 편입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부랑자 집단으로 딱지붙이고 배제함으로써 온순한 대중-신체를 생산하는 것이었다는 푸코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6.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국가라는 집합장치, 혹은 제도의 문제

 

상철: 당장 기후위기의 문제는 리바이어던의 등장이거나 아니면 X라는 정의되지 않는 정치적 대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지역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대안정치 체계를 커먼즈적 사회/국가/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의 재정을 분배하는 부분에서 기존의 복지국가적 분배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소위 내셔널 미니멈이라는 설정은 여전히 유효한가, 기본 소비에 불과한 기본 소득은 신자유주의 주체와 갈등하는가라는 질문의 끝에서 다시 커먼즈적 전환이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솔직히 아무 것도 없어서 ‘일단 커먼즈라고 하자’는 식의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맞다.   

우고 마테이가 최근에 유럽 주요 국가들의 법학자들과 작업한 것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유럽의 각국에서는 스쾃을 불법화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주택몰수에 대항할 수 있었던 정치적 힘이 많이 약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통치 체제로서 신자유주의는 극히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보면 한국은 춘천이나 대구에서 그리고 대전에서 공공건물이나 용지에 커먼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커먼즈라는 것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커먼즈론이 해방적 기획일 수 있는가라는 부분에 확신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멈칫하는 부분은 바로 이처럼 지극히 안전해 보이는 사용 때문이다. 아마 개념을 둘러싼 싸움이 중요한 맥락이 여기에 있겠다(아, 그렇다고 거긴 가짜 여긴 진짜 이런 감정사가 되자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해당 공간들이 커먼즈적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지를 검증하고 평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신: 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커먼즈는 법이나 권리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만들고 재구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천이며 커먼즈를 독점하고 사유화하는 힘에 대항하는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다(83쪽). 디디에게 ‘전환’이란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산주의의 실현으로 보인다. 다만 그 실현이 활동을 통한 관계의 확장만으로 달성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법과 권리의 문제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법과 권리의 형성이 불만을 지니고 있지만, 탈주의 욕망에 이르지는 못한 다수의 대중에게 어떤 가능성과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디: 베를린처럼 부동산 회사가 소유한 임대주택을 몰수하는 투표를 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왜 유럽에서도 스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일까? 결국 법이나 제도라는 것은 그 사회 민중의 집단적 감각, 커먼즈를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상철의 지적처럼 커먼즈적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부양의 책임과 의무와 관계로서의 가족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의 의존관계를 보다 폭넓게 설정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격한 저출산(과 이로 인한 국가의 소멸에 대한 근심들)은 그러한 부양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가족’이 실제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것, 혹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가족의 책임과 의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먼즈적 계기는 이미 (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계기는 더 원자화된 자기만족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를 어떻게 넓은 연결의 감각으로 구성할 계기를 만들지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상의 미시정치이며, 소유와 교환 방식은 물론 자율성을 둘러싼 감각을 얼마나 변화시킬 것인가이다. 나는 이 점에서 커먼즈는 사회운동의 수단이자 경로라고 생각한다. 

상철이 지역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대안적 정치체제를 커먼즈적 사회/국가/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했는데, 기층에서 제도라는 것을 넘어 계속 생성되는 커먼즈적 조건을 활성화하는 지역적이고 민주적인 (즉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를 통치하는) 정치체 혹은 통치의 형식을 고민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정치체들이 연결되는 방식을 소위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서 고민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커먼즈라고 생각한다. 우연성이라는 것은 그러한 통치 형식이 결코 사전에 기획되거나 상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맥락과 조건 속에서 펼쳐지는 커머너들의 커머닝 과정에서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우연성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상철이 커먼즈를 놀이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놀이는 앞서 말한 정치체를 유연하게 바꾸는 사회의 예처럼 우리가 우리 삶의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나는 사실 이런 커먼즈 활동을 자율성과 공통성을 회복한 노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세상에 연결하고 우리가 삶의 위기를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통치하는 자로서 우리 삶의 방식을 디자인하는 행위이다. 즉, 커먼즈는 집합 장치로서의 국가를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으로서의 국가라는 근대적 형태의 국가 장치를 거부하는 것이며, 전혀 새로운 형태의 집합적 통치 장치를 고안하려는 것이 아닐까. 즉, 커먼즈는 저항적인 성격과 생성적인 성격을 동시에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7. 커먼즈는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

 

상철: 디디의 책을 즐겁게 읽으면서 ‘커먼즈론은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디디는 커먼즈를 존재론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스스로 부정하지만 끊임없이 ‘원래 그랬다’는 이야기로 들림직한 내용들이 외삽된다. 그리고 이는 존재의 양식으로서 커먼즈라는 것을 돌출시킨다. 그런데 커먼즈는 존재론이 될 수 있나? 개인적으로 커먼즈가 존재론이 되면 지나친 윤리적 규범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커먼즈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어떤 외력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선택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소위 커먼즈적 인간으로의 복원 혹은 회복이라는 명제가 낯설 듯이 우리는 공존-협력과 갈등-무리짓기-사회적 거리와 관계-출산과 양육이라는 다양한 층위에서의 문제들이 ‘인간에겐 이런 방식이 타당하다’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커먼즈는 좀 더 개념적인 것, 그래서 다른 생각들과 경합적인 것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즉 커먼즈가 제도적 상태나 속성(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커머닝을 강조하거나 커머너를 강조하는 것이 뒤집혀서 커머닝과 커머너만이 커먼즈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커먼즈-커머닝-커머너의 개념적 위치들을 잡고 그래서 각각의 층위에 부합하는 사회적 실천의 양태들을 고안해내는 것이 좀 더 타당한 방식이다. 만약 커먼즈를 인식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디디가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부분은, 소위 신자유주의적 인식론에서 커먼즈적 인식론의 전환이라는 사회적 기획과 관련한 부분이다. 

 

디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혹은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 우리가 우리를 다스리는 방식을 만든다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삶이 공동의 작업이라는 것이고, 그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존재론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함께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커먼즈가 끊임없이 생산된다는 것이 우리가 구축한 사회가 커먼즈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커먼즈를 사유화하고 권력화하는 힘은 계속 작동하니까. 세계의 부, 다양한 가치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활동이다. 자본가는 그것을 화폐, 혹은 이윤의 형태로 추출하고 기생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네그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말해져 왔다. 즉, 우리는 이미 커먼즈의 생산 안에 속해 있고, 자본주의는 그것을 재배열함으로써 수탈하는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자본으로, 혹은 사유물로 바라보던 것을 커먼즈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미 존재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존재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8. 마무리

 

상철: 디디의 책은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괜찮은 출발점이다. 앞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계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런 작업들이 뒤따라 되어야겠다는 의견일 뿐이다. 연구자의 집에서 하고 있는 만큼 한국 커먼즈론의 진전을 기대한다. 개인적으론 디디가 그런 작업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디디: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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